‹ 목록으로 전교 여신들의 배달왕

4화

빌라촌 정문 앞에 배달 오토바이를 세워두고 헬멧을 벗은 도현은, 늦가을 밤바람이 목덜미를 훑고 지나가는 감각에 잠시 눈을 감으며 숨을 골랐다. 낮에 스쳤던 세 사람, 은서와 채린 그리고 서윤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고, 그 부촌 특유의 정갈하고 차가운 대리석 로비가 떠오를 때마다 명치 어딘가가 서늘하게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또 마주치는 건 아니겠지.' 그런 불길한 예감을 애써 지우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지만, 다행히 그날 배달을 받은 건 낯선 세대였고, 초인종을 누르자 나온 것도 처음 보는 중년 여성이었다. 도현은 별일 없이 짜장면 세 그릇을 건네고 돌아섰고, 다시 오토바이에 오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도감이 얼마나 얄궂은 것이었는지는, 다음 날 아침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바로 드러났다. 담임은 조회 시간에 종이 한 장을 흔들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학기부터 자리 배치랑 조 편성 새로 한다. 위에서 협력 학습 강화하라는 지침이 내려왔어." 아이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터져 나오는 동안 도현은 별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담임이 명단을 하나씩 부르기 시작하자 그 무심함은 순식간에 긴장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교실 곳곳에서 짧은 탄식과 웃음이 터졌고, 도현은 자기 이름이 불릴 순서가 다가올수록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이도현, 강서윤 짝."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반 전체의 시선이 일제히 도현에게로 쏟아졌고, 몇몇은 숨죽인 채 곁눈질로 서윤의 반응을 살폈다. 서윤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기며 걸어왔는데, 그 걸음걸이가 마치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처럼 흐트러짐이 없었다. 창가 자리에 앉는 내내 무심한 얼굴로 유리창 너머 운동장을 내다보는 서윤의 옆얼굴은, 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조각처럼 정갈하면서도 어딘가 차가운 성벽 같은 인상을 풍겼다. "잘 부탁해." 도현이 조심스레 건넨 인사에, 서윤은 곁눈질로 딱 한 번 도현을 훑어보더니 짧게 대답했다. "부탁할 게 뭐 있어. 그냥 옆에 앉는 거지." 냉소적인 말투였지만 그 안에 날 선 적의는 담겨 있지 않았고, 도현은 그 미묘한 온도차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더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적의는 없는데, 그럼 저건 뭐지.' 이어 조별과제 명단이 발표되며 도현의 조에 은서와 채린까지 함께 배정되자, 교실 안이 순식간에 소란해졌다. "와,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유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담임에게 항의했고, 얼굴이 붉어진 채 목소리를 높였다. "선생님, 이거 뭐 기준이 있는 겁니까? 저는 왜 저 뒤쪽 조로 빠지는데요." 담임은 서류를 정리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랜덤 배정이야. 불만 있으면 교무실로 와서 항의해." 그 말이 랜덤이 아니라는 걸 짐작한 건 도현뿐만이 아니었는지, 몇몇 아이들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며 서로 눈치를 주고받았다. 쉬는 시간, 은서가 냉큼 다가와 도현의 책상 위에 걸터앉으며 활짝 웃었다. 은서의 웃음에는 계산이 섞여 있지 않은 듯한 밝음이 있었지만, 도현은 그 밝음조차 이 부촌 아이들 특유의 여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우리 조 완전 좋다, 그렇지?" "좋기는 한데……" 도현이 뭔가 말을 아끼며 눈치를 살피자, 은서는 그의 속을 읽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걸리는데, 말해봐." "이러면 유준이 더 못 봐줄 것 같아서." 솔직한 대답에 은서는 픽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걔 신경 쓰지 마. 원래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저러는 애야.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때 뒤에서 채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건 랜덤 아니야." 담담한 한 마디에 은서와 도현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자, 채린은 하품을 씹으며 덧붙였다. "우리 셋이랑 같은 조에 들어간 애가 랜덤일 리가 없잖아. 담임한테 누가 부탁한 거지." "누가 그런 걸 왜……" 도현이 되묻자 채린은 어깨를 살짝 들었다 놓으며 더는 설명할 마음이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을 새도 없이 채린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고, 도현은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누가, 왜 이런 걸 부탁했다는 거지.' 세 사람 모두 부촌에 산다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 이 정도로 대놓고 손을 쓸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 누구일지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도현은 애써 그 생각을 밀어냈다. 생각해봤자 답이 나올 리 없었고, 답이 나온다 한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방과 후 조별과제 회의를 위해 넷이 도서관 스터디룸에 모였을 때, 형광등 불빛 아래 앉은 서윤은 교실에서 보던 것보다 한층 더 무심한 얼굴로 노트북을 펼치며 대뜬 도현에게 물었다. "너 밤에 배달 몇 시까지 해?" 예상치 못한 질문에 도현은 순간 말을 고르느라 머뭇거렸다.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 "보통 열 시, 열한 시쯤." "그럼 자료 조사는 우리가 나눠서 할게. 너는 발표만 준비해."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도현의 심장이 살짝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는데, 배려인지 동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은서가 옆에서 거들었다. "맞아, 무리하지 말고. 대신 발표 잘해야 돼, 알겠지?" 채린은 여전히 말없이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지만, 그 침묵 속에서도 도현을 배제하지 않는 미묘한 배려가 느껴졌다. 도현은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이게 정말 우연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까지 얽히게 될까 하는 생각에 손끝이 차갑게 굳는 걸 느꼈다. 그렇게 넷이 도망칠 수 없는 하나의 팀으로 묶여버렸다는 사실이, 어쩐지 도현의 가슴 한편을 묵직하게 눌렀다. 스터디룸 창밖으로 해가 저물어가는 걸 바라보며, 도현은 이 알 수 없는 호의와 관심이 앞으로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아무런 확신도 얻지 못한 채 그저 불안한 예감만을 되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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