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박준호 과장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봉투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내 얼굴로 옮겨왔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봉투를 뒷짐 진 손 뒤로 숨겨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그는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나를 스쳐 지나가버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그의 눈빛이 봉투의 두께와 색깔까지 다 훑고 지나갔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는데, 원래도 그런 사람이었다. 뭐든 한 번 보면 놓치는 법이 없는, 그런 눈을 가진 사람.
"뭐긴, 서류 정리하러 온 거지. 빨리 들어가서 자리로 와, 회의 있으니까."
그렇게 짧게 던지고는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등을 보며, 나는 어이없게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등이 곧고 걸음이 일정한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리는 게 우습기까지 했다.
'들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도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오 년 전의 시간으로 나를 다시 데려가는 문턱이 되었다. 봉투를 쥔 손끝이 여전히 축축한 채로, 나는 복도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이내 그 얼굴 위로 훨씬 어리고 서툴렀던 얼굴 하나가 겹쳐지는 걸 느꼈다.
[모든 관계에는 처음이 있다. 그리고 그 처음이 얼마나 사소했는지는, 나중에야 알게 된다.]
입사 첫 주,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실수를 저질렀다. 복사기 용지함을 반대로 넣어 종이가 걸려버리는 바람에 회의가 십 분이나 늦어졌고, 그날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던 팀장님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딱히 화를 낸 건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미간 주름 하나만으로도 나는 오금이 저릿했었다. 거래처 이름을 잘못 부르는 실수로 상대방이 당황한 표정을 짓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팀장님 자리에 놓인 서류 뭉치를 옆 팀 서류와 섞어버려서 하루 종일 그걸 찾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때는 사무실 파티션 사이를 몇 번이나 오가며 서류철을 뒤졌는지 모른다. 손끝이 종이에 베여 따끔거리는 것도 모른 채로, 이러다 잘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서.
그럴 때마다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다녔는데, 그런 나를 매번 구해준 게 바로 옆자리의 한소영 선배였다.
"서류는 색깔별로 구분해두면 편해요."
그녀는 내가 서류를 섞어놓은 걸 발견하고도 화를 내는 대신, 그렇게 담담히 말하며 색색깔의 클립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파란 클립과 빨간 클립이 짤그락,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떨어졌다.
"이렇게 파란 클립은 우리 팀, 빨간 클립은 저쪽 이 팀. 어때요, 이제 안 헷갈리겠죠?"
그녀의 말투에는 가르치려는 티가 조금도 나지 않아서, 나는 그게 오히려 더 미안하고 고마워서 고개만 연신 끄덕였다. 그날 이후로 내 책상 위에는 늘 파란 클립과 빨간 클립이 나란히 놓여 있었고, 그걸 볼 때마다 나는 소영 선배의 담담한 목소리를 함께 떠올렸다.
점심시간이 되면 소영 선배는 늘 내 옆에 앉아 밥을 먹었다. 회사 근처 식당의 메뉴판을 훑는 그녀의 손짓 하나에도 나는 괜히 신경이 쓰였는데, 그녀가 늘 같은 자리, 창가에 가까운 두 번째 테이블을 고집했던 것도 나는 나중에야 눈치챘다.
"오늘 표정 보니까 또 뭐 사고 쳤죠?"
그녀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뒤적이며 그렇게 물으면,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그날의 실수를 다 털어놓았고, 그녀는 배를 잡고 웃다가 이내 정색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근데 그거, 나도 신입 때 똑같이 했어요. 신입 필수 코스라고 생각해요, 도윤 씨."
그 말이 어찌나 위로가 됐는지, 나는 그날 처음으로 회사 화장실이 아니라 식당에서 웃을 수 있었다. 밥알이 목에 걸릴 정도로 웃었던 것 같은데, 그런 나를 보며 그녀도 따라 웃던 그 표정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같은 팀 동기인 박지현과 최영수도 그 무렵부터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지현이는 늘 커피를 세 잔씩 사놓고 자리마다 나눠주며 "이거 마시고 힘내자, 우리" 하고 다녔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늘 한 톤 높아서 사무실 저 끝까지도 다 들릴 정도였다. "도윤 씨, 오늘도 얼굴이 반쪽이네요, 이거 마셔요, 마셔요!" 하며 종이컵을 내 손에 억지로 쥐여주던 그 손길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든든했다.
영수는 매번 야근할 때마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와서는 "먹고 해야 힘이 나지, 안 그래?" 하며 슬쩍 내 책상에 하나씩 올려두곤 했다. 그는 말이 많지 않은 편이었지만, 그 대신 이런 사소한 행동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뜨거운 컵라면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며, 나는 야근의 서러움도 조금은 잊을 수 있었다.
그런 사소한 배려들이 쌓여, 나는 그 사무실이 조금씩 낯설지 않은 공간으로 변해가는 걸 느꼈다. 처음엔 형광등 불빛조차 낯설고 차갑게만 느껴졌던 그 공간이, 어느새 사람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로 채워지며 조금씩 온기를 띠어갔다.
소영 선배는 특히 내가 실수로 만든 보고서를 몰래 고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내가 숫자를 잘못 입력한 채로 팀장님께 보고서를 올릴 뻔했는데, 그녀가 지나가다 슬쩍 화면을 보고는 "어, 여기 0 하나 더 붙었다" 하고 짚어주었고,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가도 곧 안도의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탁!
그녀가 마우스를 클릭해 숫자를 수정하는 그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다. 손끝 하나로 태연하게 오류를 잡아내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며, 나는 잠깐 숨을 죽였던 것 같다.
"선배님 아니었으면 저 오늘 잘렸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에이, 그 정도로 안 잘려요. 대신 나중에 커피 한 잔 사요."
그 커피 한 잔이, 그 뒤로 얼마나 많이 오갔는지는 세어보지도 못했다. 자판기 커피에서 시작해 어느새 카페 아메리카노로, 다시 그녀가 좋아하던 달콤한 라떼로 바뀌어갔던 그 취향의 변화까지도, 나는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 무렵의 나는 하루 열두 시간씩 이어지는 업무 속에서도 소영 선배와 나누는 그 짧은 대화들 덕분에 조금씩 버틸 힘을 얻고 있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저 친한 선후배 사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건네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하루의 기분이 결정된다는 걸, 나는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런 나날들 속에서도, 박준호 과장의 존재는 사무실 한쪽에 늘 그림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신입사원이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조용히 지켜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씩 던지는 사람이었는데, 그 한마디가 얼마나 날카로운 것인지를 나는 아직 완전히 알지 못한 채였다. 그저 그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만을, 이유도 모른 채 그때는 그냥 낯가림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서늘함의 이유를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모른 채로 지나쳐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