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다음 날 아침, 교실 문을 열자마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나를 스쳤다가 다시 무시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누구도 오래 쳐다보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는 그 정도의 무게였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으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교실 앞쪽을 살폈다.
하늬는 저 앞에서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어제 그 하얗게 질린 얼굴은 흔적도 없었다.
완벽한 미소, 완벽한 목소리.
누가 무슨 말을 걸어도 적당한 타이밍에 웃고,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늬야, 어제 학생회 회의 늦게 끝났다며?"
"응, 조금. 별거 아니었어."
별거 아니었다는 말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나.
계단에서 떨던 손끝을, 나는 분명히 봤는데.
대단하다, 저 가면.
나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연애 시퀀스 파일이 그대로였다.
한 줄도 못 쓴 채로.
커서만 깜빡였다. 깜빡, 깜빡.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 "반년만 다듬어라. 그럼 터진다."
호태 형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대로 초콜릿 고스트는 터졌다.
80만 장.
지금 이 교실에 있는 애들 중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내 옆자리 애는 지금 내가 수학 숙제도 안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쉬는 시간, 휴대폰이 울렸다.
호태 형이었다.
"야, 다음 작품 연애 이벤트 씬 다 됐냐?"
"아니."
"또 왜."
"내가 연애를 안 해봤잖아."
전화 너머에서 웃음이 터졌다.
크게, 아주 크게.
"천재 개발자가 그것 땜에 발이 묶였다니, 이거 기사 나가면 재밌겠다."
"형."
"장난이야, 장난. 근데 진짜 취재라도 좀 해봐. 상상만으론 안 되는 게 있어. 너 지금까지 쓴 대사들 보면, 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들뿐이잖아. 실제로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알맹이가 없어."
"그럼 형이 알려줘. 형은 연애 많이 했잖아."
"내가 알려주는 거랑 네가 직접 겪는 거랑 같냐. 인마, 이건 시식이랑 직접 요리하는 거 차이야."
취재.
그 단어가 머릿속에 박혔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 그 단어만 곱씹었다.
취재라는 게, 결국 누군가를 겪어야 한다는 뜻인데.
내 주변에 그럴 만한 사람이 있나.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였다.
어제 계단에서, 벌칙 고백 때문에 사색이 된 채로 떨던 얼굴.
점심시간, 나는 학생회실 앞에서 하늬를 기다렸다.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동안 몇 명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갔다.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늬가 문을 열고 나오다 나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뭐야."
하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방어적이고, 날이 서 있었다.
교실에서 보여주던 그 매끄러운 웃음은 없었다.
"어제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당연히 그래야지."
"조건이 있어."
하늬의 눈이 가늘어졌다.
경계심이 확 올라오는 게 눈에 보였다.
"조건?"
"나랑 사귀는 척 좀 해줘."
순간 하늬의 얼굴이 굳었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지나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하늬는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뭐?"
"진짜로 사귀자는 거 아니고. 취재용으로."
"...취재?"
"나 게임 만들거든. 시나리오 쓰는데 연애 장면을 못 써. 겪어본 적이 없어서."
하늬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저 눈이, 계산하고 있는 건지 그냥 어이없어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실습 대상이 되어달라는 거야?"
"어. 대신 벌칙 고백 사건은 내가 계속 숨겨줄게."
말을 뱉고 나서야 이게 얼마나 이상한 제안인지 깨달았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이 남자가 진짜.
누가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할 거다.
사실 미친놈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늬가 한참 침묵했다.
손끝이 다시 치맛자락을 꾹 눌렀다.
그 손짓, 어제도 봤던 그 손짓.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인가.
"...조건이 뭔데. 구체적으로."
"그냥 몇 번 만나서 얘기하고, 데이트 같은 것도 좀 해보고. 나는 관찰만 할게."
"관찰?"
"응. 취재."
"그럼 넌 아무 감정도 없이 나를 그냥 자료처럼 본다는 거네."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린다는 걸 나도 느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대충 그런 셈이지."
하늬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예상보다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좋아. 하지만 딱 한 달이야. 그 이상은 안 돼."
"왜 한 달?"
"그 안에 벌칙 끝났다는 증거 만들어야 해. 안 그러면 계속 놀림받아."
생각보다 순순한 반응이었다.
너무 순순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어쩐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이 이상한 계약이 성립됐다는 사실이 더 신경 쓰였다.
"콜."
"콜."
짧게 악수를 나누고 나서, 나는 뭔가 잘못된 계약을 맺은 기분이 들었다.
손을 놓고 나서도 손바닥에 남은 온도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왜인지 모르게 하늬의 눈빛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체념 같은, 그리고 아주 작은 기대 같은.
복도를 걸어가는 하늬의 뒷모습을 잠깐 지켜봤다.
치맛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나는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그날 밤 나는 다시 시나리오 파일을 열었다.
책상 위 스탠드 불빛만 켜놓은 방 안, 노트북 화면이 유독 밝았다.
연애 시퀀스, 첫 문장을 쳤다.
『여주인공의 손끝이 떨렸다.』
쓰다 보니 어제 계단에서 본 하늬의 손이 자꾸 떠올랐다.
취재라고 해두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그 얼굴이 겹쳐졌다.
문장을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 몇 번을 반복했다.
결국 원래 문장으로 돌아왔다.
이게 정말 취재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일까.
머릿속에서 그 질문이 자꾸 맴돌았지만, 답을 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 화면에 낯선 알림이 떴다.
발신인은 하늬였다.
『내일부터 시작하는 거지? 조건 하나 추가할게.』
조건이 하나 더 있다는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 계약, 생각보다 훨씬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