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나래의 방문 앞에 서자, 서윤은 잠시 숨을 골랐다.
문패도 없고 이름도 없는 평범한 원룸 도어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질 대화가 자신의 인생을 뒤흔들 거라는 예감이, 손끝부터 서서히 스며들었다.
나래가 먼저 들어갔다. 서윤은 그 뒤를 따랐다.
방은 화면으로 봤던 것보다 훨씬 정돈되어 있었다. 조명 스탠드는 각도가 정확하게 맞춰져 있었고, 마이크 팝필터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벽 한쪽에는 팬들이 보낸 것으로 보이는 굿즈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인형, 부채, 그리고—
서윤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자신이 예전에 후원했던 팬아트였다.
'이거, 내가 그린 사람이 그린 게 아니라... 산 거였나.'
서윤은 딴생각을 하다가 스스로에게 놀랐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방 안의 공기는 달랐다. 화면 너머로 느껴지던 다정한 온도가 아니라, 서늘하고 건조한 냉기가 감돌았다.
나래가 문을 닫았다.
철컥.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마치 밀실에 갇히는 소리 같았다.
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래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바닥에 던지고, 서윤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방송에서 보던 웃음기 대신, 무표정한 얼굴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자, 이제 둘밖에 없으니까 솔직하게 말할게요.
목소리부터 달랐다. 방송용 톤이 아니었다. 낮고, 차갑고, 정제된 말투였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등 뒤는 이미 벽이었다.
— 언니가 어제 쓴 글, 지금 실검 3위예요.
나래가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서윤 앞에 들이밀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 그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댓글창. 서윤의 눈이 빠르게 그 위를 훑었다. 자신이 쓴 저격글의 캡처가, 이미 수천 개의 리트윗을 달고 퍼져 있었다.
— 소속사에서는 벌써 법적 대응 검토한다고 난리고. 그 프로게이머 쪽 팬덤이랑 제 팬덤이랑 싸움 나서 서로 저격하는 중이고요. 저는 지금 이미지 하나로 먹고사는 사람인데, 그 이미지가 언니 손에 부서지기 직전이에요.
말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무섭게 들렸다.
— 미, 미안해. 몰랐어. 진짜 몰랐어서—
서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 알았으면 안 썼을 거예요?
나래가 되물었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서윤이 입을 다물었다. 정직하게 말하면,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화면 속의 남자와 나란히 웃고 있던 나래의 사진을 봤을 때 밀려왔던 그 뜨거운 감정이 뭐였는지, 지금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질투였나. 아니면... 다른 거였나.'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서윤은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래는 팔짱을 끼고 서윤을 내려다봤다. 방 안의 조명이 나래의 얼굴 절반에만 떨어져, 표정의 반쪽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 방법이 하나 있어요. 근데 언니가 해줘야 해요.
— ...뭔데.
서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 저랑 공식 연인 하는 거예요.
서윤의 눈이 커졌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 뭐?
— 지금 논란의 핵심이 '남자랑 사귀는 거 아니냐'거든요. 근데 제가 이미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하면? 그것도 새로 생긴 예쁜 언니가 있었다고 하면?
나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건 웃음이라기보다는, 이미 답을 정해놓은 사람의 여유였다.
— 그게... 말이 되냐, 그게—
서윤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 되게 만들 거예요. 제가.
나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방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서윤은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두려움인지, 다른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 그리고 언니는 선택권이 별로 없어요.
나래가 손가락 하나를 펴 보였다.
— 하나는 저랑 계약 연애하는 거.
그리고 다른 손가락 하나를 더 폈다.
— 다른 하나는 제가 오늘, 그 저격글 작성자가 제 새언니라는 거, 실명이랑 학교까지 통째로 커뮤니티에 흘리는 거.
— 너, 너 진짜—
서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와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목 안쪽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왔지만, 그걸 삼키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독사 같다고 생각하죠?
나래가 먼저 말했다. 마치 서윤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 맞아요. 저 그런 사람이에요.
그 말에는 부정할 여지조차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서윤은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다.
'이 계약을 받아들이면, 학교도, 우리 가족도, 다 무너지지 않을 수 있어.'
'하지만 이건... 사기잖아. 이건 팬들을 두 번 속이는 거잖아.'
두 개의 생각이 팽팽하게 맞섰다. 어느 쪽으로도 마음이 완전히 기울지 않았다.
— 안 해. 못 해.
서윤이 겨우 뱉어낸 말이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눈빛만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나래가 눈썹을 슬쩍 올렸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래가 서윤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서윤의 등이 벽에 완전히 붙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 정말요?
나래가 서윤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그 순간, 서윤의 숨이 멈췄다.
— 언니, 이거 팬 사인회 때 제가 하던 멘트인데... 직접 들으면 느낌 다를걸요.
나래의 목소리가 방송에서 듣던 그 톤으로 바뀌었다. 다정하고, 나긋하고, 심장을 살살 건드리는 그 목소리였다.
— 매일 밤, 저는 화면 너머에 있는 언니를 생각하면서 방송해요. 오늘도, 늦게까지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낮은 숨소리가 그 말끝에 섞여 들었다.
서윤의 무릎이 풀렸다.
'미, 미쳤다. 저 목소리, 저 톤, 저 숨소리—'
온몸이 얼어붙었다. 저항할 힘이 남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리듯, 이건 위험하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몸은 이미 그 목소리에 반응하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은 차갑게 식었는데, 얼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게 프로다운 거구나. 이게... 저 애가 수만 명을 움직이는 방법이구나.'
나래가 몸을 떼며 웃었다. 이번엔 방송용 미소가 아니라, 승리를 확신한 미소였다.
— 반응 보니까 답 나온 것 같은데.
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열려고 했지만,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졌다. 완전히 졌다.'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 인정조차 씁쓸했다.
— 알겠지, 언니?
나래가 다시 물었다. 다정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거절을 허락하지 않는 단단함이 있었다.
서윤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래가 손을 내밀었다. 가늘고 하얀 손이었다. 방금까지 서윤을 몰아붙이던 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손끝은 부드러워 보였다.
— 그럼 우리, 잘 부탁해요.
서윤은 그 손을 잡았다.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나래의 손은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지금 이 계약의 온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서윤은 잡은 손을 놓지 못한 채, 나래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봤다. 그 얼굴에는 이미, 다음 계획을 짜고 있는 듯한 표정이 스치고 있었다.
무언가 훨씬 더 큰 일이 시작되고 있다는 예감이, 서윤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