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골목 안의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늦여름 저녁의 습기가 시멘트 벽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물기 밴 냄새가 올라왔다.
가로등 하나가 깜빡이며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 흐릿한 불빛 아래로 세 명의 남학생과 여학생 한 명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고, 그 구도만으로도 상황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도윤은 원래 그 골목을 지나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골목 어귀에서 들려온 낮은 실랑이 소리와, 그 소리에 섞인 여학생의 짧고 불안한 숨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고, 도윤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지나칠 만큼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세 명의 남학생 중 키가 큰 쪽이 도윤을 향해 성큼 다가서며 어깨를 밀치자, 도윤은 뒤로 반 발짝 물러서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그 눈빛에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뜻이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넌 뭔데 끼어들어."
남학생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함께 상황을 얼른 정리하고 싶다는 조급함이 섞여 있었는데, 그 조급함 뒤에는 누군가 이 상황을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옅은 불안도 함께 묻어 있었고, 도윤은 그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읽어내며 오히려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쪽이 먼저 시작한 거 아닌가요, 이 학생 괴롭히는 거."
"괴롭힌 게 아니라 번호 좀 물어본 거야."
"셋이 둘러싸고 물어보는 게 정상은 아니죠."
도윤의 말에 여학생 쪽에서 짧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는데, 그 숨소리에는 안도보다는 여전한 경계심이 더 짙게 배어 있었고, 도윤은 그 경계심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방금까지 그녀를 둘러싼 세 사람을 향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남학생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중 한 명이 낮게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고, 나머지 둘도 괜히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듯 낮게 욕설을 뱉으며 골목 밖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그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도윤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멀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도윤은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순간에는 몰랐는데, 그 힘이 빠지자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고, 도윤은 그 떨림을 애써 무시하며 여학생을 향해 돌아섰다.
"괜찮으세요?"
"···네."
짧은 대답 뒤로 여학생은 가방끈을 다시 고쳐 메며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이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보였고, 도윤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했다.
**강서린**
또렷한 눈매와 다부지게 다문 입술이 인상적인 여학생이었고, 몸에 걸친 교복은 흠 하나 없이 정갈했지만, 어깨를 잔뜩 움츠린 자세에서 방금 겪은 일의 긴장이 채 풀리지 않았음이 드러나 있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끝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고, 그 아래로 드러난 목덜미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창백하게 보였는데, 그 창백함이 단순히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방금까지의 상황 때문인지 도윤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도윤이 별생각 없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집이 이쪽이면 큰길까지 같이···"
"됐어요."
서린의 대답은 도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차갑고 단호했는데, 내밀었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추자 도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손을 도로 거두었다.
"도와줬으면 그냥 가면 되잖아요."
서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건조했지만, 그 안에는 방금까지의 두려움을 억누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섞여 있었고, 도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무디지는 않았다.
서린의 눈빛에는 고마움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 위로 겹겹이 쌓인 방어의 벽이 훨씬 두꺼워 보였다.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그냥···"
"남자들은 다 그래요, 처음엔 도와주는 척, 나중엔 대가를 바라고."
서린의 말투에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온 듬직한 확신이 담겨 있었는데, 그 확신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된 학습의 결과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고, 도윤은 그 말의 무게가 자신을 향한 비난이 아니라 그녀가 지금까지 쌓아온 어떤 벽의 일부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순간 도윤의 머릿속에는 짧은 궁금증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궁금증을 입 밖으로 꺼낼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으므로, 도윤은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물러섰다.
"알겠어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도윤은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억지로 친절을 강요하는 것도 결국은 서린이 말한 그 '대가를 바라는' 부류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이지만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도윤이 돌아서서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등 뒤에서 서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고마워요."
작고 짧은 그 한마디에는 방금까지의 날카로움과는 다른 온도가 섞여 있었는데, 마치 얼음 표면 위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생긴 것 같은, 그런 온도였고, 도윤은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옅게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를 대신했다.
골목을 벗어나며 도윤은 방금 있었던 일이 딱히 대단한 사건은 아니라고 스스로 정리했다. 그저 곤경에 처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한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두지 않으려 애썼고, 걸음을 옮기는 내내 머릿속에서 그 장면을 몇 번이고 지우려 했다.
하지만 큰길로 나서기 직전,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
같은 시각, 골목 안에 남은 강서린은 도윤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다시 한 번 깜빡였고, 그 불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벽을 따라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지는 것을 서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호의를 앞세워 다가온 뒤 대가를 바랐고, 그 대가라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추악한 형태로 돌변하는지 서린은 몸으로 겪어 알고 있었다.
그 기억들은 지금도 불쑥불쑥 떠올라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었고, 방금 같은 상황에서도 어김없이 몸이 먼저 굳어버렸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지긋지긋했다.
그런데 방금 그 남학생은 도와준 뒤로도 손을 내밀거나 번호를 묻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냉정하게 밀어내자 순순히 물러섰다.
더 이상 붙잡지도,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는데, 서린이 알던 남자들은 대부분 그 정도의 거절에도 집요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특이하네.'
서린은 그 낯선 반응에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는데, 그 발걸음 속에는 방금 느낀 작은 균열이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다.
큰길로 나서자 저녁 공기 속으로 자동차 소음과 상점의 불빛들이 뒤섞여 들어왔고, 서린은 그 익숙한 소음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도 좀 전의 골목이 유난히 멀게 느껴지는 것을 느꼈다.
집으로 향하는 길, 서린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언니: 오늘 늦어? 저녁 같이 먹자.]
화면에 뜬 짧은 문장을 보며 서린은 옅게 웃음을 지었다. 언니의 문자는 언제나 짧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그 안에 걱정이 배어 있다는 것을 서린은 알고 있었다.
서린은 답장을 보내며 무심코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렸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우려는 듯 화면을 꺼버렸다.
[서린: 아니, 지금 가는 중이야. 금방 도착해.]
짧은 답장을 보내고 나서도, 골목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쳤고, 서린은 그것을 애써 걸음의 속도에 묻으려 했다.
하지만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서린의 머릿속에는 골목에서 마주친 무표정한 얼굴이 자꾸 되풀이해 떠올랐다.
붙잡지 않던 손, 물러서던 걸음, 그리고 짧게 웃으며 들어 올렸던 손짓까지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되살아났는데, 그것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낯선 감정이라는 것을, 서린은 아직 알지 못한 채였다.
천장을 바라보며 서린은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고, 그럴수록 그 얼굴은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냥 우연히 마주친 사람일 뿐인데.'
스스로에게 그렇게 되뇌었지만, 그 되뇜이 오히려 그 얼굴을 지우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을, 서린은 그 밤이 다 지나갈 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