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다음 날 오전 8시, 한빛고등학교 정문.
김도윤은 가방끈을 고쳐 메며 교문을 통과했는데,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어젯밤 골목에서의 일이 손끝에 남아 있는 감각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세 남학생의 팔을 잡아 뜯어내던 순간의 팽팽한 긴장감, 그들의 거친 숨소리와 뒤엉킨 욕설, 그리고 그 모든 소란이 끝난 뒤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던 자신의 무심한 뒷모습까지도.
'별일 아니었어.' 도윤은 속으로 되뇌며 애써 마음을 눌렀지만, 이상하게도 그 여학생의 눈빛만은 지워지지 않았다. 또렷하고 날카로운, 그러나 어딘가 상처 입은 듯한 눈빛. 골목의 어스름 속에서도 유난히 빛나던 그 눈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서, 도윤은 걸음을 옮기는 내내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어 그 잔상을 떨쳐내려 했다.
"야, 김도윤." 박태준이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다가오자, 도윤은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태준은 헐레벌떡 뛰어온 듯 숨이 조금 가빴는데, 교복 셔츠 깃이 삐뚜름하게 접혀 있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곧장 도윤의 옆에 붙어 걸음을 맞췄다.
"어제 왜 늦게 나왔냐. 문자도 안 보고." 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캐묻는데, 그 눈빛에는 순수한 궁금증과 약간의 서운함이 뒤섞여 있었다. 도윤은 어깨를 슬쩍 움츠리며 대답을 미뤘다.
"그냥, 좀 일이 있었어."
"일? 무슨 일?" 태준이 바짝 붙어서 캐물었지만, 도윤은 대답 대신 걸음을 빨리했다. 태준은 몇 걸음 뒤처지다가 다시 뛰어와 붙으면서도, 더 이상 캐묻지 않고 그저 옆에서 종알종알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제 본 축구 경기 이야기, 담임 선생님의 새 넥타이 이야기, 그리고 곧 있을 중간고사에 대한 걱정까지. 도윤은 그 말들을 절반쯤은 흘려들으며, 나머지 절반의 신경은 여전히 어젯밤의 그 눈빛에 붙잡혀 있었다.
교실 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란스러웠는데, 그 중심에는 늘 그렇듯 한서준이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서준의 주변으로 여학생 셋이 모여들어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서준은 곤란한 얼굴로 손을 내저으며 뭔가를 설명하는 중이었다.
"아니, 그건 그냥..." 서준이 어색하게 말을 흐리자, 여학생들은 오히려 더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서준의 귓가가 슬쩍 붉어지는 것이 보였는데, 그 모습이 밉지 않아서인지 여학생들의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도윤은 그 풍경을 자리에 앉아 무심히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의 자리가 얼마나 조용한지를 새삼 깨달았다.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 의자를 끄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그 조용함이 새삼스럽게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아무도 그의 이름을 특별히 기억하지 않았다. 그것이 서운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 골목에서의 일 이후로 어딘가 마음 한 켠이 낯설게 뒤척이고 있었다. 마치 조용한 물속에 작은 돌 하나가 떨어져 파문을 일으킨 것처럼, 그 잔물결이 잦아들지 않고 자꾸만 마음의 표면을 건드렸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 태준은 옆자리에서 도윤의 팔을 슬쩍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어제 문자 씹은 거 처음이잖아."
도윤은 창밖을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별거 아니었다니까."
태준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지만, 마침 담임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서면서 대화는 그대로 끊겼다. 수업이 시작되고, 도윤은 칠판을 향해 눈을 두었지만 정작 머릿속에는 어젯밤의 골목이, 그 서늘한 공기와 그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
점심시간, 도윤은 태준과 함께 급식실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는데, 복도 특유의 냄새—식판 부딪히는 소리와 뒤섞인 음식 냄새, 그리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 그 공기 속을 지나며,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무리 중 하나와 시선이 얽혔다.
강서린이었다.
다부지게 다문 입술과 단정하게 묶은 머리, 흠 없이 정갈한 교복 차림 그대로였지만, 오늘은 어제와 달리 그녀의 시선이 도윤을 정확히 향하고 있었다. 서린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주변 친구들에게 짧게 무언가를 말하고는 혼자 도윤 쪽으로 다가왔다. 그 걸음걸이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곧았는데, 그럼에도 도윤에게 다가오는 몇 초 사이에는 어딘가 조심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어제, 그거." 서린이 낮은 목소리로 운을 떼며 시선을 아래로 살짝 내렸는데, 그 모습이 평소의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조심스러워 보였다. 손끝으로 교복 소매 끝을 살짝 매만지는 작은 습관적 동작이, 그녀 안에도 망설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맙다고, 다시 말하려고."
도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니었어."
"별거 아닌 게 아니야." 서린이 단호하게 말을 자르며 도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어제 골목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지만, 오늘은 그 안에 다른 온도가 섞여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나서는 사람, 별로 없어."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도윤이 짧게 대답했지만, 그 말이 서린에게는 조금 서운하게 들렸는지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아니야. 다들 그냥 지나갔을걸." 서린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는데, 마치 그런 경험을 이미 여러 번 해봤다는 듯한 어조였다. 도윤은 그 말투에서 언뜻 스치는 씁쓸함을 느꼈지만, 그것을 캐물을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그 말에 도윤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는데, 옆에 서 있던 태준이 눈을 크게 뜨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태준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고, 그는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 말을 하려다가도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기만 했다.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도 걸음을 늦추며 이쪽을 힐끔거렸는데, 강서린이 남학생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이 학교에서는 흔치 않은 풍경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린은 그 시선들을 신경 쓰지 않는 듯 태연했지만, 도윤은 그 주변의 웅성거림이 점점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린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려 원래 있던 무리로 돌아갔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윤의 손끝이 어쩐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묶은 머리끝이 걸음에 맞춰 살짝 흔들리는 것을 눈으로 좇으며,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몇 초간 더 서 있었다.
'남성혐오가 심하다던 그 여학생이...' 도윤의 머릿속에 어제 들었던 소문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애들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던, 그래서 오히려 더 신비롭게 회자되던 그 여학생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인 것이었다.
"야, 너 저 애 알아?" 태준이 옆구리를 찌르며 다급하게 물었다. "강서린이잖아, 6반. 남자애들한테는 눈길도 안 준다는 걸로 유명한. 근데 방금 그거 뭐야, 너한테 고맙다고 한 거야?"
"...그런 거야." 도윤이 얼버무리자, 태준은 못 미더운 눈으로 도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 뭔가 숨기는 거지. 어제 그 문자 씹은 거랑 관련 있는 거지?"
도윤은 대답 대신 서린이 사라진 복도 끝을 잠시 바라보았는데, 어제 골목에서의 그 눈빛이 다시 떠오르며 이상한 여운이 가슴속에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그 여운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낯설고 미묘한 온도로 도윤의 가슴 한켠에 눌러앉았다.
***
오후 수업이 끝난 뒤, 도윤은 교실을 나서다가 게시판 앞에 몰려 있는 무리를 지나쳤는데, 그 중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익명 게시판에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6반 강서린이 3반 남학생한테 먼저 다가갔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도윤은 순간 걸음을 멈춰 섰다.
"진짜? 걔가? 남자한테?" 다른 목소리가 놀란 듯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점심시간에 급식실 가는 복도에서 봤다는 애가 한둘이 아니야."
"근데 그 남학생이 누구래?"
"그건 아직 모른대. 근데 게시판에 곧 밝혀질 것 같다고 써 있어."
소문은 이미 학교 전체로 퍼지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이름이 있었다. 도윤은 게시판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듯 서 있었는데, 등 뒤로 지나가는 아이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목덜미를 타고 서늘하게 번져갔다.
'설마 벌써 알려진 건 아니겠지.' 도윤은 속으로 되뇌며 애써 걸음을 옮겼지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군거림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태준이 언제 다가왔는지 옆에서 어깨를 툭 치며 낮게 속삭였다.
"야, 이거 너 얘기 아니냐?"
도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게시판에 붙은 종이 위로 시선을 던졌다. 종이 위에 적힌 짧은 글자들이 마치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화살처럼 느껴졌고, 그 아래로 덧붙여진 댓글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는 이름을 알아내려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벌써 몇 가지 추측을 내놓고 있었다. 도윤은 그 모든 시선과 말들이 서서히 자신에게로 좁혀 오는 것을 느끼며, 어젯밤 골목에서의 그 짧은 순간이 이렇게 커다란 소문으로 번질 줄은 몰랐다는 사실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