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왕비의 반격

2화

그날 밤 이후로 며칠이 지나도록 이서윤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눈을 감으면 태윤의 서늘한 눈동자만이 되풀이해 떠올라 마음을 짓눌렀으며, 그 눈빛이 처음 마주했던 온화함과 얼마나 다른 것이었는지를 되짚을 때마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무엇을 잘못했을까…….'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물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고, 그 물음은 결국 오래전의 기억으로 그녀를 데려가고 말았으니, 이서윤은 그 기억의 첫 장면조차 이제는 낯설지 않을 만큼 수없이 되짚어 온 터였다. 이서윤의 어머니는 그녀가 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로 청하 공작가의 크고 냉랭한 저택 안에서 그녀는 늘 혼자였다. 높은 천장과 긴 회랑, 발소리조차 크게 울리는 대리석 바닥은 어린 이서윤에게는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낯선 성채와 같았고, 그 안을 걸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집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버지는 슬픔을 견디는 방식으로 무심함을 택했고, 그 무심함은 시간이 흘러도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으며, 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죽은 아내를 떠올리게 하는 일인 듯 늘 시선을 피하곤 했다. 새로 들어온 후처 오은주는 처음부터 이서윤을 향해 살가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존재 자체를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여기는 눈빛을 감추지 않았고, 그 곁에 함께 들어온 어린 딸 한소이만이 아버지의 눈길과 저택의 온기를 모두 가져가는 것을 이서윤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소이가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이서윤은 창가에 홀로 서서 그 웃음소리를 듣곤 했으며, 그때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온기가 되어준 것이 강태윤이었다. 왕실과 청하 공작가의 오랜 인연으로 어린 나이에 혼약이 맺어졌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태윤은 낯선 소녀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며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있으니, 이제 혼자가 아니오." 그 말이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이서윤은 그 이후로 십 년 동안 그 한마디를 붙잡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날 태윤의 손은 크고 따뜻했으며, 그 온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번져오는 것을 느끼며 이서윤은 처음으로 이 냉랭한 저택 안에서도 살아갈 이유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더랬다. 명절마다 청하가를 찾아오는 태윤의 발걸음, 편지에 담긴 소소한 안부, 함께 걷던 정원의 산책길 하나하나가 그녀에게는 유일하게 견딜 만한 이유였으니, 봄이면 정원의 매화나무 아래에서 그가 꽃잎 한 장을 주워 그녀의 머리에 살짝 얹어주었던 기억이, 여름이면 함께 연못가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물빛만 바라보던 오후가, 가을이면 낙엽을 밟으며 나란히 걷던 그 발소리가, 그녀에게는 사계절 내내 마음을 지탱해주는 작은 등불과도 같았다. 태윤의 머리카락은 짙은 밤빛을 닮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고, 그 아래로 드리운 눈매는 늘 서늘한 듯 보이면서도 그녀를 향할 때만큼은 온화하게 풀어지곤 했으며, 곧게 뻗은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은 왕가의 핏줄답게 흐트러짐 없는 위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녀와 마주할 때면 그 딱딱한 선마저 살짝 부드러워지는 듯했다. 그 눈동자가 오늘처럼 완전히 낯선 빛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이서윤은 결혼식 밤이 되기 전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하루의 서러움이 모두 씻겨 내려가는 듯했던 시절이었으니, 그 온화함이 언젠가는 얼어붙은 무관심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단 한 번도 예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십 년, 그를 향한 믿음만으로 버텨온 시간이었으니, 결혼식 밤의 그 한마디가 어떤 균열을 만들어냈는지는 이서윤 자신조차 처음에는 온전히 가늠하지 못했다. 화촉이 밝혀진 침전, 붉은 비단 이불 위로 스며들던 은은한 향, 그 모든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태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가 십 년간 쌓아온 믿음을 단숨에 무너뜨릴 만큼 서늘했으며,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이서윤은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통증을 느끼곤 했다. 혼례를 올린 지 어느덧 삼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태윤은 단 한 번도 그날의 말을 거두지 않았다. 왕비의 침전에는 언제나 그녀 홀로였고, 궁의 시녀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오직 어둠 속에서만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묻곤 했다. '그때 그 말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답을 찾지 못한 물음은 삼 년째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었고, 그 사이 이서윤의 얼굴에는 예전의 생기 대신 조용한 인내만이 남아 있었다. 궁녀들의 수군거림, 대신들의 곁눈질, 심지어 왕대비의 은근한 압박까지도 그녀는 홀로 견뎌내야 했으며, 그 모든 무게가 그녀의 어깨 위에 켜켜이 쌓여갈수록 이서윤의 걸음걸이는 조금씩 더 무거워지고 있었다. 왕비의 처소로 돌아가는 회랑, 창밖으로 스며드는 노을이 붉게 번지는 것을 바라보며 이서윤은 옷자락을 가만히 여몄다. 궁의 규율에 따르면 왕비는 후계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책무를 지고 있었고,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왕비를 향한 시선이 얼마나 차가운지는 이미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 후궁을 들이라는 대신들의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그녀의 이름이 은밀히 오르내린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 모든 시선과 소문 속에서도 이서윤은 겉으로는 흔들림 없이 걸음을 옮겼으나, 회랑을 걸을 때마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가 점점 야위어가는 것을 볼 때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또각. 발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순간 이서윤은 걸음을 멈추었고, 뒤돌아본 그 자리에는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으니, 삼 년간 자신을 지켜본 오래된 시녀 연희였다. "마마, 안색이……." 조심스러운 그 물음에 이서윤은 애써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연희의 눈에는 그 웃음 속에 숨겨진 그늘까지 다 보인다는 듯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 연희는 이서윤이 이 궁에 들어온 첫날부터 그녀를 모셔온 시녀였고, 그 누구보다 왕비의 표정 하나, 숨소리 하나까지 세심히 살펴온 사람이었기에, 지금 이서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괜찮다. 그저…… 잠시 옛일을 떠올렸을 뿐이야." 말끝을 흐리며 다시 걸음을 옮기는 이서윤의 뒷모습을 연희는 오래도록 바라보았고, 그 시선 속에는 이서윤이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결심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연희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깊고 무거웠으며, 마치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었던 무언가를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듯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로 옅은 숨이 새어 나왔으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서윤은 그때까지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붉게 물든 노을 속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