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연희가 전해준 말은 그날 이후 이서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밤이 되면 침소의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몸을 뉘어도 잠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고, 눈을 감으면 오히려 더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서고의 창가였다. 궁의 가장 깊은 곳,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밴 그 건물의 작은 창에서 밤늦도록 새어 나오던 불빛을 이서윤은 직접 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눈앞에 있는 듯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상상인지를 그녀 자신도 모르지 않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이불깃을 움켜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스스로 몇 번이나 되뇌며 부정했지만, 그 부정의 밑바닥에는 오히려 부정하고 싶은 만큼의 확신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으니, 이서윤은 결국 자신이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는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도, 궁녀들의 발소리가 복도를 지날 때마다 숨을 죽이게 되는 것도, 모두 그 하나의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르륵.
옷깃이 이불에 스치는 소리마저 크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연희는 그날 이후에도 위험을 감수하며 궁 안의 소문을 조금씩 이서윤에게 전해주었다. 시녀들 사이에서 소리 없이 오가는 은밀한 대화, 내관들이 서로 주고받는 미묘한 눈빛, 그리고 서고의 출입 기록까지 하나하나 챙겨오는 그녀의 손끝은 늘 조심스럽게 떨리고 있었으니, 그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지는 이서윤도 잘 알고 있었다. 궁이라는 곳은 벽에도 눈과 귀가 달려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누가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가 곧 권력의 흐름을 결정짓는 곳이었고, 그런 곳에서 특정 인물의 동향을 캐어 전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저울 위에 얹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연희, 너에게 너무 큰 위험을 지우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구나."
어느 날 밤, 조용히 건넨 그 말에 연희는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마께서는 저를 거두어주신 은인이십니다. 그때 제가 죄를 뒤집어쓸 뻔했을 때, 마마께서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말에 이서윤은 잊고 있던 옛일을 천천히 떠올렸다.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귀한 장신구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고, 그날 마침 그 근처를 지나쳤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시녀 하나가 도둑으로 몰려 벌을 받기 직전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했지만, 이서윤은 그 시녀의 겁에 질린 눈빛이 결코 거짓을 말하는 자의 눈이 아님을 알아보았고, 결국 나서서 그 아이를 감싸주었었다. 그것이 바로 연희였음을 이서윤은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 않았지만, 연희는 그 은혜를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작은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구나.'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려왔다.
"하지만…… 만약 저하나 청하 아가씨 쪽에서 네가 나에게 정보를 전한다는 걸 알게 되면……."
말을 끝맺지 못한 이서윤의 얼굴에 걱정이 짙게 어렸으나, 연희는 오히려 담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미 마마의 사람이니까요."
짧은 그 한마디가 얼마나 무거운 각오를 담고 있는지를, 이서윤은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시녀의 지위란 언제든 다른 이로 갈아치울 수 있는 자리였고, 그런 자리에서 어느 한쪽에 서기로 마음을 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안위를 스스로 위태로운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일과 같았으니, 연희는 그 위험을 알고도 이서윤의 곁을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 결심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이서윤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 무게를 온전히 헤아리기에는 아직 자신의 처지조차 불안하기만 했다.
며칠 뒤, 연희는 다시 은밀히 이서윤을 찾아와 소매 속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사락.
종이가 펼쳐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이것은 서고 출입 기록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 최근 한 달간, 저하와 청하 아가씨의 서고 방문 시각이 겹치는 날이…… 열흘이 넘습니다."
서고의 출입은 본래 아무나 함부로 기록에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궁의 서고에는 오래된 문헌과 왕실의 비밀스러운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었기에, 그곳을 드나드는 자는 반드시 시각과 이름을 남겨야 했고, 그 기록을 관리하는 이는 극히 소수의 신뢰받는 내관뿐이었다. 그러니 그 기록을 옮겨 적어 이서윤에게 가져온다는 것 자체가, 연희가 그 소수의 신뢰 안으로 얼마나 위태롭게 발을 들여놓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종이를 받아든 이서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숫자로 나열된 날짜와 시각을 하나하나 눈으로 짚어 내려가는 동안, 가슴 한복판이 서늘하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유(酉)시, 술(戌)시, 때로는 늦은 밤을 뜻하는 해(亥)시까지, 두 사람의 방문 시각은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자주 겹쳐 있었고, 그 겹침이 반복될수록 이서윤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부정했던 의심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자주…….'
"이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겠지."
낮게 중얼거리는 이서윤의 말에 연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시각이 겹친다는 것만으로는 두 분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지, 함께 계셨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마, 언젠가는 이 기록이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곱씹으며 이서윤은 종이를 소중히 접어 품 안에 감추었다. 옷 속으로 파고드는 종이의 서늘한 감촉이 마치 자신이 짊어진 무게를 대신 말해주는 듯했고, 그것을 가슴에 품는 순간 이서윤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길에 발을 들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훗날 자신에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게 될지, 그리고 그 종이를 손에 넣기 위해 연희가 이미 얼마나 위험한 자리에 서 있었는지를, 이서윤은 아직 온전히 헤아리지 못한 채였다.
그날 밤, 연희가 물러간 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이서윤은 한참을 그 종이를 품에 안고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바람 소리에도 몸이 움찔거렸고, 혹시라도 누군가 문밖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방문 밖에서 낯선 발소리가 조용히 다가오는 것을 이서윤은 느꼈다.
또각, 또각.
일정한 간격으로 가까워지는 그 발소리는 평소 궁녀들의 걸음과는 어딘가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었으니, 이서윤은 숨을 삼키며 품 안의 종이를 더욱 깊숙이 감춘 채 문 쪽을 향해 조심스레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