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연희가 건네준 그 얇은 종이 뭉치를 품에 간직한 채로도, 이서윤은 며칠 동안 서고 근처를 지나칠 때마다 걸음을 늦추곤 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연희의 손끝에서 건네받았던 그 기록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고, 종이를 넘기던 손끝의 떨림을 이서윤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후궁의 처소를 드나든 이의 명단, 그리고 그 명단 사이사이에 적힌 낯익은 이름 하나를 확인했을 때, 이서윤은 숨을 삼키며 애써 고개를 저었다.
"물론, 확인해 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마마."
연희는 그렇게만 말했고, 더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서윤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이서윤은 그 기록을 다시 꺼내 보지 못했다. 마치 눈을 감으면 그 진실이 사라져 줄 것이라 믿는 사람처럼, 그녀는 애써 일상을 살아냈고, 아침이면 옷을 갈아입고 저녁이면 처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러나 그 사이사이, 태윤의 얼굴이 문득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저릿하게 아려오는 것을 그녀는 부인할 수 없었다.
그날은 후궁 행사의 서류를 확인하러 서고에 들를 일이 있었다. 다가오는 연회의 준비 목록을 대조해야 했고, 평소라면 시녀를 데리고 낮에 다녀올 일이었으나, 낮 동안 밀린 일들에 치여 결국 밤이 되어서야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늦은 시각이라 사람이 없을 것이라 짐작한 이서윤은 시녀도 물린 채 홀로 걸음을 옮겼다. 궁의 회랑을 따라 걷는 발걸음 소리만이 정적을 채웠고, 달빛이 처마 끝에 걸려 희미하게 부서지는 광경을 그녀는 무심히 지나쳤다.
서고에 가까워질수록 이서윤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무거워졌다. 마치 무언가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발끝이 자꾸만 느려졌고, 손끝이 옷깃을 만지작거렸다.
서고의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들은 순간 이서윤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이 시각에…… 누가.'
의문이 스치는 것도 잠시, 이서윤은 목소리의 결을 알아차리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태윤 님, 정말로…… 서윤 언니에게는 아무 마음도 없으신 거죠?"
간드러진 목소리가 서고의 정적을 가르며 흘러나왔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이서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소이. 지난달부터 궁을 드나들게 된, 자신이 손수 예를 갖춰 맞아들이고 자매처럼 아껴주었던 여인이었다.
"그 사람은 이제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소. 소이, 너뿐이야."
낮게 가라앉은 태윤의 대답이 뒤따르는 순간, 이서윤은 숨을 삼키며 문틈으로 시선을 옮겼고, 그 안에서 마주한 광경에 심장이 통째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어두운 서고의 서가 사이, 태윤이 한소이의 뺨을 가만히 감싸 쥔 채 이마를 맞대고 있었다. 그 다정한 자세는 결혼식 밤 이후 단 한 번도 이서윤에게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이었고, 그 낯선 온기에 그녀는 순간 자신이 알던 태윤이 맞는지조차 의심하고 말았다.
짙은 밤빛 머리카락 아래 드리운 태윤의 눈매는 오늘도 서늘했지만, 한소이를 향할 때만큼은 예전 이서윤이 알던 그 온화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낙차가 너무도 선명하여 이서윤은 순간 숨쉬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저 눈빛…… 나에게도 저런 눈으로 웃어준 적이 있었는데.'
혼례를 올리던 날, 태윤은 이서윤의 손을 잡고 그렇게 웃어준 적이 있었다. 십 년 전, 낯선 왕실에 홀로 들어와 두려움에 떨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다정한 목소리를 건네준 이가 바로 그였다. 그 기억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며, 이서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그녀는 분명히 느꼈다.
"언니는 제게 늘 잘해줬는데……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요."
한소이의 목소리에는 옅은 웃음이 배어 있었고, 그것이 죄책감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에 가깝다는 것을 이서윤은 그 짧은 순간에도 알아차렸다. 마치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듯한, 승자의 여유가 담긴 그런 웃음이었다.
"그러니까 더더욱,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 그 사람은…… 애초에 나에게 아무것도 준 적이 없었으니까."
태윤의 그 말이 서고의 벽을 타고 이서윤의 귓가에 스며드는 순간, 십 년을 지켜온 믿음이 소리 없이 부서지는 소리를 그녀는 분명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십 년…… 십 년을 함께했는데.'
혼례를 치르던 날부터, 왕자로서 냉소적이던 태윤의 곁을 지키며 보낸 그 모든 시간이 이서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밤늦게까지 그의 서재 불빛이 꺼지지 않으면 손수 차를 끓여 가져다주던 밤들, 그가 병으로 앓아누웠을 때 사흘 밤낮을 곁에서 지키던 순간들, 그 모든 시간이 정말 그에게는 '아무것도 준 적이 없는' 시간이었다는 뜻인가.
속으로 되뇌는 목소리조차 떨려 나왔고, 이서윤은 더는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어 뒷걸음질 쳤으나, 발끝이 문 옆에 놓인 화병을 건드리고 말았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서고 안을 울리는 순간, 안쪽의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이서윤은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음을 깨달으며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숨을 삼켰다.
"서윤 언니……?"
놀란 척 눈을 크게 뜨는 한소이의 얼굴에는 당황보다 먼저 어떤 계산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고, 이서윤은 그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보았지만, 이미 손발이 떨리고 있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한소이는 황급히 태윤에게서 몸을 떼어내며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그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것은 진짜 당혹감이 아니라 잘 짜인 연극의 한 장면 같았다. 이서윤은 그 얄미울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눈이 어두웠던가를 뒤늦게 깨달았다.
태윤은 아무런 변명도 없이 그저 서늘한 눈으로 이서윤을 바라보았고, 그 침묵이 오히려 어떤 대사보다도 더 명확하게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마치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예상했다는 듯, 그저 무심한 얼굴로 이서윤을 응시할 뿐이었다.
'저 눈빛에는…… 죄책감조차 없구나.'
그것이 오히려 이서윤을 더 아프게 했다. 차라리 당황해서 변명이라도 늘어놓았다면, 최소한 그가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부끄러움 정도는 느끼고 있다는 뜻이었을 텐데, 저 무표정한 얼굴은 애초에 자신을 향한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서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을 돌려 서고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조차 듣지 못할 만큼, 그녀의 걸음은 정신없이 회랑을 가로질렀다.
그날 밤 이후 이서윤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촛불이 다 타들어가 어둠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때까지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상하게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 깊은 곳에서 낯선 감각이 서서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눌러왔던 무언가가 마침내 자리를 찾아가는 듯한, 서늘하고도 또렷한 감각이었다.
'더는…… 이렇게 침묵하고 버티기만 해서는 안 돼.'
그 확신이 처음으로 그녀의 안에서 선명하게 자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십 년을 인내하고 견뎌왔던 그 모든 시간들이,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윤은 그 결심을 채 실행하기도 전에, 궁 안 어디선가 이미 다른 종류의 소문이 국왕의 귀에까지 닿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소문이 무엇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지도, 그리고 그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서윤은 그 밤이 다 지나도록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