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무너진 왕비의 반격

3화

삼 년이라는 시간은 왕궁의 회랑을 걷는 이서윤의 발걸음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처음 입궁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고, 지나칠 때마다 옷깃을 여미며 눈을 내리깔았으며, 그 모든 것이 왕비라는 자리가 가진 무게 때문이라고 이서윤은 순진하게 믿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인사는 형식으로만 남았고, 고개를 숙이는 각도는 조금씩 얕아졌으며, 뒤에서 오가는 수군거림은 점차 노골적으로 그녀의 귀에까지 닿기 시작했다. 발소리. 복도 저편에서 상궁들의 발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이서윤은 자연스레 걸음을 늦추고 숨을 죽이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것은 그녀들이 자신을 보지 못했다고 여기고 나누는 대화가 언제나 가장 솔직한 궁의 민심이었기 때문이었다. "삼 년째 아이가 없으시다니, 왕비의 자리가 위태롭지 않겠소." "위태롭다 뿐이겠소. 저하께서 그리 냉담하시니, 오죽하면 청하 아가씨를……" 거기까지 듣고서야 이서윤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청하라는 이름이 그 대화 속에 섞여 나올 때면 이상하게도 심장이 먼저 반응했고, 그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서윤은 애써 모른 척하곤 했다. 귓가를 스치는 대화를 못 들은 척 지나쳐야 하는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왔고, 그럴 때마다 이서윤은 등줄기를 곧게 세운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지만, 처소에 돌아와 홀로 문을 닫고 나면 어깨가 무너지듯 내려앉는 것을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왕비의 소임이라 불리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했으나, 실상은 끝없는 의례와 접견, 지방에서 올라오는 진상품의 검수, 왕실 행사의 세세한 준비까지 모두 왕비의 손끝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나 예복을 갈아입고, 하루 종일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저려오는 접견을 몇 차례고 견뎌내야 했으며, 밤이 되어서야 겨우 촛불 아래 앉아 다음 날의 일정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 이서윤의 일상이었다. 그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면서도 정작 그녀 자신을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서윤의 나날은 소임이라는 이름의 굴레에 가까웠다. 그 굴레 속에서도 이서윤이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태윤이 언젠가는 다시 예전의 그 눈빛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 때문이었다. 처음 혼례를 올렸던 날, 붉은 예복을 입고 마주 앉았던 태윤의 눈동자에는 분명 온기가 있었고, 그 온기를 이서윤은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는 그 믿음을 붙잡고 매일 아침 몸을 일으켜 예복을 갈아입고 접견실로 향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속으로 되뇌는 그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자기 위안인지를 이서윤 자신도 모르지 않았지만, 그것 없이는 하루조차 버텨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매번 그 말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준 것은, 뜻밖에도 사소한 하나의 사건이었다. 지방 사신단이 왕궁을 방문한 어느 날, 접견실은 평소보다 훨씬 무거운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먼 나라에서 온 사신들의 복식은 궁의 것과 확연히 달랐고, 그들이 주고받는 낮은 목소리에는 낯선 억양이 짙게 배어 있었다. 접견실에 모인 대신들은 저마다 통역관의 입만 바라보며 사신들의 의중을 짐작하려 애썼고, 그 어색한 정적 속에서 사신 하나가 예를 갖추며 낯선 언어로 인사를 건네왔다. 그 순간,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통역관을 향했다. 하지만 통역관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서윤이 먼저 그 나라의 말로 유창하게 응대했다. 어릴 적부터 익혀온 몇 개국의 언어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나, 그것을 듣는 이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고, 좌중이 놀라움에 잠시 침묵했던 그 순간, 사신들조차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이서윤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갖췄다. 그런데 그 순간, 태윤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음에도 아내를 향해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저만큼 오래 함께 있었는데도…… 어째서 눈길조차 주지 않는 걸까.' 속으로 되묻는 사이, 이서윤은 애써 표정을 다잡고 다시 사신들과의 대화를 이어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무언가가 조용히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예전의 태윤이었다면, 그 자리에서 가장 먼저 자신을 향해 자랑스러운 눈빛을 보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태윤은 그저 창밖을 응시하거나, 혹은 다른 대신들과 눈짓을 주고받을 뿐, 이서윤이 그토록 애써 만들어낸 그 순간조차 그의 시선 속에는 담기지 않았다. 접견이 끝난 뒤, 홀로 남은 이서윤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방금까지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았다. 사신들의 감탄, 대신들의 술렁임, 그리고 그 모든 것 속에서 유일하게 침묵했던 태윤의 얼굴. 그것을 곱씹는 사이 발소리가 다가왔다. "마마." 연희였다.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여는 그녀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이 어려 있었고, 그 눈빛만으로도 이서윤은 좋은 소식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지?" 이서윤은 애써 담담한 투로 물었지만, 이미 가슴 한편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희는 몇 번이고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고, 그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이서윤의 심장은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저하께서…… 요즘 자주 서고에 드나드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각에 청하 아가씨께서도 함께 계신다는 말이……" 말끝을 흐리는 연희의 목소리에 이서윤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청하 아가씨란 다름 아닌 한소이, 자신의 의붓여동생이자 이제는 궁의 후원 행사에 종종 초대받는 손님이었으니, 이서윤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왜인지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이는 어릴 적부터 늘 이서윤의 그늘 아래 서 있던 아이였고, 그늘 아래에서도 유독 밝게 웃는 법을 알던 아이였다. 그런 소이의 이름이 태윤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서윤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서늘함이 손끝까지 번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무슨 뜻이지?" 애써 담담하게 물었지만 목소리는 이미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연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이서윤은 자신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마마께서 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연희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또렷했고, 그 말속에는 차마 다 담지 못한 무언가가 배어 있었다. 이서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회랑 너머로 서고의 지붕이 어렴풋이 보였고, 그 지붕 아래 어딘가에서 태윤과 소이가 무엇을 나누고 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부정하는 마음과 확신에 가까운 불안이 동시에 밀려들었고, 이서윤은 그 두 마음 사이에서 어느 쪽도 붙잡지 못한 채 그저 서고의 지붕만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연희의 그 말이 앞으로 이서윤이 마주할 어떤 진실의 서문이었다는 것을, 그 순간의 이서윤은 다만 흐릿한 예감으로만 느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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