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후문 광장은 늦은 오후의 햇살로 물들어 있었다. 은채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떨고 있었다. 무릎 위에 얹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도윤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걸 발견하자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표정은 다급했다.
— 왔구나! 빨리 앉아.
은채가 도윤의 팔을 잡아끌었다. 손끝에서 힘이 느껴졌다. 도윤은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다. 벤치 나무가 살짝 삐걱거렸다.
은채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도윤 쪽으로 바짝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 너희 헤어졌다는 얘기, 서윤이한테 들었어.
도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손끝이 무릎 위에서 살짝 굳었다.
— 벌써 얘기했어?
— 응. 그것도 카페에서 나오는 길에 나한테 전화해서...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있었어. 그런데 도윤아, 너 지금 서윤이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
— 어떤 상탠데. 시원하게 헤어지자고 하고 갔는데.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은채는 그런 도윤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걘 지금 방 안에서 울고 있어.
도윤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기 시작했다.
— ...뭐?
— 나한테 전화해서 엉엉 울면서 그러더라. '나 왜 그랬을까, 나 왜 그런 말밖에 못 했을까'라고.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도윤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 헛웃음에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 장난하지 마. 걘 나한테 매일 독설만 했어. 헤어지자고 할 때도 1초도 안 걸렸고.
— 도윤아.
은채가 도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 서윤이, 너 진심으로 좋아해. 그것도 아주 많이.
도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좋아하는데 그렇게 말해?
— 걘 그런 애야. 츤데레라고 하지, 몰라?
도윤은 속으로 생각을 밀어넣었다.
'츤데레라니. 그런 게 진짜 있어?'
머릿속에서 서윤의 목소리가 재생됐다. 차갑고, 단호하고, 어딘가 날카로운 목소리.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는 걸 상상하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은채는 답답한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 나랑 서윤이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야. 걘 원래 좋아하는 사람한테 못되게 구는 애야. 부끄러워서 그런 거야. 진심을 표현하는 법을 몰라.
— 그래도 그렇게까지... 매일같이 사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게 정상이야?
은채는 잠시 침묵했다. 벤치 아래로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정상은 아니지. 근데 걔 나름의 방식이야. 진짜야, 도윤아. 너 걔가 얼마나 너 얘기 많이 하는지 알아? 나만 만나면 네 얘기해. '오늘 강도윤이 이랬어, 저랬어'. 근데 그게 다 좋아하는 티야. 나쁜 얘기처럼 들려도, 걔 표현이 그게 최선인 거야.
도윤은 미간을 좁혔다. 믿고 싶지 않은 마음과, 그래도 조금은 흔들리는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두 감정이 가슴 속에서 부딪혔다.
— 증거 있어?
은채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도윤에게는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 있어. 내가 걔 몰래... 아니, 정확히는 걔가 나한테 보낸 음성메시지가 있어. 걔 우는 목소리로 너 얘기하는 거.
— 보여줘.
도윤의 목소리가 순간 다급해졌다. 그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 지금은 안 돼. 폰이 서윤이 집에 있어. 충전기 두고 왔거든. 근데 내일 학교 오면 보여줄게. 약속해.
도윤은 팔짱을 끼고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등받이가 삐걱거리며 그의 무게를 받아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진짜일까. 아니면 그냥 은채가 서윤이 편들려고 하는 말일까.'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한 가닥의 기대도 함께 피어올랐다. 만약 정말이라면. 만약 서윤이 진심이었다면.
도윤은 그 생각을 애써 지우려 했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은채의 표정은 진지했다. 장난기라곤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 도윤아, 부탁이야. 한 번만 더 믿어봐. 걔가 지금 얼마나 후회하는지 몰라서 그래. 너 걘 진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애야. 처음부터 그랬어. 초등학교 때도 좋아하는 남자애한테 괜히 시비 걸고 그랬다니까.
— ...그런 거였어?
— 응. 그때도 나한테 울면서 그랬어. '나는 왜 이러지, 좋아하는데 왜 못되게만 굴까'. 걘 안 변했어. 지금도 똑같은 거야.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 지금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생각해볼게.
— 그래, 그거면 됐어. 대신 내일 꼭 나와. 증거 보여줄 테니까.
은채는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 손바닥이 따뜻했다.
— 걔 잃으면 후회할 거야. 나 믿어.
도윤은 그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은채의 눈빛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그 확신이 도윤의 마음을 슬며시 파고들었다.
헤어지자마자 몇 시간 만에 벌어진 이 급작스러운 반전에, 도윤의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벤치에서 일어나 캠퍼스를 걷는 동안에도 은채의 말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진심으로 좋아해', '엉엉 울면서', '너 얘기 많이 해'. 조각난 말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부딪혔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해지고 있었다. 내일,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예감이었다.
그날 밤, 도윤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잠들지 못했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에서 가끔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만 들려왔다. 서윤의 차가운 얼굴과, 은채가 전한 '울고 있다'는 말이 자꾸 겹쳐졌다. 어느 쪽이 진짜 서윤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도윤은 몸을 뒤척였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깼다. 눈을 감으면 서윤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흔들림 없던 눈빛, 단호했던 말투. 그런데 그 안에 눈물이 숨어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걔가 정말 울었을까.'
'아니면 은채가 걔 대신 변명을 해주는 걸까.'
두 가지 생각이 번갈아 떠오르며 도윤을 잠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벽시계 소리만 째깍째깍 방 안을 채웠다.
휴대폰 화면이 다시 밝아졌다. 은채였다.
[내일 아침 9시, 학생회관 앞. 꼭 나와. 재밌는 거 보게 될 거야.]
도윤은 그 문자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재밌는 거'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대체 무엇을 보여주려는 걸까. 화면의 불빛이 어두운 방 안을 짧게 밝히다가 다시 꺼졌다.
도윤은 휴대폰을 협탁에 내려놓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일이면 모든 게 분명해질 거라는 기대와, 어쩌면 더 복잡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동시에 그를 짓눌렀다.
천장의 어둠 속에서 도윤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