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조용히 좀 살고 싶었는데

4화

이서연이 학급 위원장 선거를 언급한 다음 날부터, K클래스의 공기가 달라졌다. 원래는 그냥 조용히 앉아 있다가 흩어지는 반이었는데, 이제는 누가 누구 옆에 앉는지, 누가 누구랑 눈이 마주치는지까지 다들 신경 쓰는 눈치였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 가는 애들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녔고,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보다 먼저 눈치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이게 그 파벌이라는 건가.' 나는 딱히 관심 없었지만 상황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건 느껴졌다. 교실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하나 그어지고, 그 선을 사이에 두고 다들 어느 쪽에 서야 할지 재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점심시간, 이서연이 급식판을 들고 자연스럽게 내 앞자리에 앉았다. "같이 먹을까요." '물어보는 척은 하는구나.' 이미 앉아놓고 물어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네." 대답하는데 다은이 저 멀리서 이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느껴졌다. 딱히 내 쪽을 보는 게 아니라 이서연을 보는 것 같았는데, 그 눈빛이 평소와 좀 달랐다. 뭐랄까, 처음 보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날카롭다기보다는, 뭔가를 재는 듯한 눈빛. 식판을 사이에 두고 이서연은 별다른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젓가락질이 지나치게 정갈해서 나까지 어깨가 굳는 기분이었다. '저건 무슨 예의범절 교과서에서 배운 젓가락질이냐.' 식사가 끝날 무렵 이서연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강지우 학생, 궁금한 거 있어요?" "딱히." "보통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물어보는데." "물어보면 대답해줄 거야?" 이서연이 살짝 웃었다. 웃는 얼굴인데도 여전히 그 눈은 웃지 않는 느낌이었다. '웃는 표정이 저렇게 안 어울릴 수도 있구나.' "이가는 이번 세대에 후계자 선정을 앞두고 있어요. 후계자로 인정받으려면 일정 조건이 필요한데, 그중 하나가 배우자 후보의 가치예요." '배우자 후보라니, 갑자기 그게 왜 나와.' 밥알이 목에 걸릴 뻔했다. 겨우 물을 한 잔 들이켜고 나서야 목소리가 나왔다. "건국가 사이에서는 남성 배우자의 사회적 가치가 여성 후계자의 입지에 직결돼요. 강지우 학생 같은 조건은… 흔치 않아요." "조건이 뭔데." "가문 배경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남학생. 어느 가문에도 빚지지 않은." 말을 듣고서야 대충 감이 왔다. 나는 어느 가문에도 속하지 않았으니까, 다른 귀족가와 정치적으로 얽힐 위험 없이 이서연 쪽에서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카드라는 뜻이었다. '와, 사람을 그냥 물건 취급하네.' 새삼스러운 것도 아닌데 막상 대놓고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니까 그쪽 목적은 나한테 관심 있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해 뭔가 얻으려는 거네." 이서연이 그 말에 처음으로 잠깐 표정을 흐트렸다. 젓가락을 쥔 손끝이 아주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처음엔 그랬는데, 지금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는데, 이서연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식판을 정리하고 있었다. 대답을 더 듣기도 전에 김하린한테서 메시지가 왔다. 〈지우 학생, 지금 학교 커뮤니티 좀 보세요.〉 화면을 켜니 게시판이 난리였다. '이서연 선택권 행사 배경'이라는 제목의 글이 여러 계정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요약하면 방금 이서연이 나한테 직접 말해준 내용과 거의 같았다. 가문 후계자 조건, 배우자 가치, 정치적 계산. '이걸 누가 이렇게 빠르게 퍼뜨려.' 댓글창을 내리는 손가락이 저절로 빨라졌다. 조회수가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댓글 중 눈에 띄는 게 있었다. 'B클래스 박세아, 신유하, 민서하 쪽에서 나온 정보 같음.' 이름 자체는 처음 듣는 애들이었다. 하지만 반응은 명확했다. 이서연 쪽 계산을 폭로해서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시작된 거였다. '벌써 편 나눠서 싸움 시작하는 거야? 나는 그냥 밥 먹고 싶었을 뿐인데.' 댓글 밑에는 벌써 "강지우 그럼 팔려가는 거임?" 같은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팔려간다는 표현이 묘하게 정확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오후 수업 도중, 소라가 옆으로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지우야, 나 좀… 이상한 걸 느꼈어." "뭐가." "이서연이 너 볼 때, 다은이 볼 때, 나 볼 때 눈빛이 다 다른 것 같아서." '그 눈치는 또 언제 생겼대.' 소라가 서울 오고 나서 눈치가 빠르게 늘고 있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순진한 애가 어느새 반 분위기를 읽고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조금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뭐가 다른데." "음… 너 볼 땐 계산하는 눈빛이고, 다은이 볼 땐 견제하는 눈빛이고, 나 볼 땐……" 소라가 말을 멈췄다. "나 볼 땐 뭔데." "몰라. 그냥 좀 무서웠어." '무섭다는 감정을 저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애가 어딨어.' 수업 종이 치는 바람에 대화는 거기서 끊겼지만, 소라의 그 말이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방과 후, 다은이 처음으로 나한테 먼저 말을 걸었다. 원래는 항상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대답하던 애였는데. 가방을 챙기던 손을 멈추고 돌아보니 다은이 벌써 얼굴이 반쯤 굳어 있었다. 뭔가 결심하고 온 표정이었다. "지우 씨, 저 뒷자리로 옮겨진 거 계속 신경 쓰여요." "그건 이서연이……" "알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 다은이 잠깐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손가락으로 가방끈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지우 씨가 다른 사람이랑 그렇게 붙어 있는 거 보는 게 별로 안 좋았어요." '이건 또 뭔 반응인데.' 머릿속이 잠깐 하얘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감이 안 왔다. "그게 무슨……" "그냥, 그랬다고요." 다은은 그 말을 하고 곧바로 얼굴이 빨개져서 가방을 챙겨 나갔다. 뒷모습이 도망치듯 빠른 걸음이었다. '다들 왜 이래, 갑자기.' 뭔가가 이 반 안에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내가 서 있다는 것도. 교실을 나서면서도 다은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별거 아닌 말인데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그냥 신경 쓰인다는 거지, 다른 뜻은 없을 거야.' 스스로 그렇게 정리해 보려 했지만, 정리가 잘 안 됐다. 김하린이 그날 저녁 다시 연락을 해왔다. 〈B클래스 쪽 파벌, 조사 좀 더 해봤어요.〉 "뭔데." 〈박세아, 신유하, 민서하. 이 셋이 이서연 견제를 위해 뭔가 큰 걸 준비하는 것 같아요. 규모가 생각보다 커요.〉 '큰 게 뭔데.' 핸드폰 화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답을 기다렸다. 김하린은 원래 말을 아끼는 편이 아닌데, 이번엔 뭔가 뜸을 들이는 느낌이었다. "빨리 말해." 〈확실한 정보인지 한 번 더 확인하느라 그래요.〉 "확인했으면 말해." 김하린의 다음 메시지가 오는 데 몇 초가 걸렸다. 〈그쪽에서 K클래스 집단 전학을 신청할 거라는 얘기가 돌아요.〉 나는 화면을 한참 들여다봤다. 집단 전학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오는데도 실감이 잘 안 났다. '전학이라니, 그게 무슨.' 〈규모가 어느 정돈데.〉 〈지금 파악한 것만 열 명 넘어요. 계속 늘어나는 중이고요.〉 K클래스가 이제 곧 사람으로 넘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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