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조용히 좀 살고 싶었는데

5화

김하린이 전해준 정보는 하루도 안 지나 사실로 확인됐다. 다음 날 아침, 교무실 앞 게시판에 새로운 전학 공지가 붙어 있었다. 'B클래스 박세아, 신유하, 민서하, K클래스 전학 신청 완료.' '이건 또 뭔 시추에이션이야.' 나는 게시판 앞에 서서 그 문구를 세 번은 다시 읽었다. 글자가 바뀔 리 없는데도 어쩐지 오독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B클래스면 전체 열한 개 반 중 두 번째로 높은 등급이다. 최우수자였던 이서연이 K클래스로 온 것도 이례적이었는데, 이번에는 세 명이 동시에 아래로 내려온다는 게 말이 됐다. 등급이라는 게 원래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는 구조 아니었나. 그런데 여기 애들은 하나같이 아래로, 아래로, 내 쪽으로만 몰려들었다. '뭐야, 여기가 무슨 블랙홀이야.' 주변에 서 있던 다른 반 애들도 게시판을 보며 수군거렸다. "K클래스 뭐 있냐?" "몰라, 요즘 이상하게 사람이 몰려." 그 말을 듣는 내 등에 식은땀이 한 줄 흘렀다. 담임은 조회 시간에 그 소식을 전하면서 뭔가 지친 표정이었다. "음, 다들 알겠지만, 오늘부터 우리 반에 세 명이 더 늘어납니다." 담임의 목소리에는 이미 이 사태를 몇 번이나 겪은 사람 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저 선생님도 나름 고생이 많으시겠다.'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교실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들어왔다. 첫 번째, 박세아. 짧은 단발머리에 눈매가 날카로웠다. 걸음걸이에 낭비가 없었다. 두 번째, 신유하.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더 사람을 긴장시켰다. 세 번째, 민서하. 체구가 다부졌고 걸음걸이가 정확했다.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집안이라던 김하린의 정보가 떠올랐다. 셋 다 자리를 훑으며 곧바로 나를 찾았다.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 꽂히는 게 세 개 동시에 느껴졌다. 마치 레이저 포인터 세 개가 이마에 동시에 맞은 느낌이었다. '이건 좀 부담스러운 수준을 넘었는데.' 박세아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강지우 학생 맞죠.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형식적인 인사였지만 그 뒤에 붙는 눈빛은 절대 형식적이지 않았다. 뭔가를 평가하는 눈이었다. 마치 마트에서 고기 등급 매기는 사람 같은 눈빛이었다고 해야 할까. '나 지금 몇 등급쯤 되는 거야, 대체.' 신유하는 별다른 말없이 고개만 살짝 숙였다. 그런데 그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더 신경을 긁었다.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이상하게 압박감이 느껴진다는 게 말이 되나. 민서하는 반대로 성큼성큼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민서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하는데 손에 힘이 얼마나 센지 손가락뼈가 살짝 아릴 정도였다. '이거 인사인지 시위인지.' 이서연이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손끝이 살짝 책상을 두드리고 있었다. '저것도 나름의 반응이겠지.' 이서연은 원래 표정을 잘 안 드러내는 애였는데, 저 손끝 소리만으로 지금 얼마나 불편한지가 다 읽혔다. 나는 괜히 그 소리가 신경 쓰여서 자꾸 이서연 쪽을 돌아보게 됐다. 쉬는 시간이 되자 반 분위기가 완전히 갈렸다. 한쪽엔 이서연, 그 반대쪽엔 새로 온 세 명. 중간에 어정쩡하게 다은과 소라, 그리고 원래 K클래스에 있던 다른 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교실 한복판에 투명한 선이 하나 그려진 것 같았다. '이거 완전 삼국지 축소판인데.' 신유하가 자연스럽게 내 자리로 다가와 물었다. "강지우 학생, 학급 위원장 선거 얘기 들었어요?" "응." "이번에 저도 부위원장으로 나가려고요." '벌써 다 판이 짜여 있었구나.' "…그건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강지우 학생 표를 받고 싶어서요." 너무 솔직한 대답에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차라리 돌려서 말했으면 화라도 났을 텐데, 저렇게 대놓고 나오니까 반박할 거리조차 없었다. "…나한테 그런 걸 왜 기대하는데." "강지우 학생이 K클래스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학생이니까요." '그 영향력이라는 게 대체 언제 생긴 건데.' 아무도 나한테 알려준 적이 없는데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 게 웃겼다. "이 반은 대체 뭐로 굴러가는 반인지." 한편 다은은 새로 늘어난 사람들 때문에 존재감이 더 줄어드는 걸 느끼는 눈치였다. 원래도 조용한 애였는데, 이제는 아예 자리에 앉아 필기만 하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교실 분위기를 살피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는 걸 몇 번이나 봤다. "지우 씨." 점심시간에 다은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저는 이제 뒤에서 세 번째 자리로 또 옮겨질 것 같아요." "왜 그렇게 생각해." "박세아 학생 쪽에서 자리 배치 다시 하자고 담임한테 얘기했다는 것 같아서요." '벌써 자리싸움까지 하는 거야.' "그거 확실한 정보야?" "그런 것 같아요. 아까 담임 선생님이 저 쪽 애들이랑 따로 얘기하는 걸 봤거든요." 다은의 목소리는 화를 내는 것도, 억울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미 정해진 일을 통보받는 사람처럼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이 상황이 좀 짜증스럽다는 걸 느꼈다. 딱히 누구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 반 자체가 나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어진 것 같아서. "자리 배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일단 지켜보자." "네, 알겠어요." 다은은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필기 노트로 눈을 돌렸다. 저 노트에 진짜 필기가 얼마나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소라도 그 무렵부터 눈에 띄게 말이 줄었다. 원래도 눈치를 열심히 보던 애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관찰자 모드로 들어간 것 같았다. 쉬는 시간마다 조용히 창밖을 보거나 책상 아래 핸드폰만 만지고 있었다. "소라야, 왜 이렇게 조용해." "그냥, 지금 잘못 말하면 어느 편이든 걸릴 것 같아서." '그 걱정을 열여섯 살짜리가 하고 있다니.' "편 같은 거 안 갈라도 돼. 그냥 하던 대로 해." "말은 쉬운데요, 지우 씨." 소라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지우 씨 주변이 지금 제일 위험한 자리인 거 몰라요?" 그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방과 후, 김하린이 차 안에서 태블릿 하나를 건넸다. "이거 보세요. A클래스 쪽 데이터베이스 접속 기록이에요." "이건 어떻게 구한 거야." "그냥, 인맥이 좀 있어서요." 김하린은 종종 이런 식으로 정보를 물어왔다. 출처를 물어봐도 제대로 답해주는 법이 없었다. 저 인맥이라는 게 대체 몇 다리를 거치는 건지 궁금하긴 했지만, 물어봐도 답이 안 나올 걸 알기에 그냥 넘겼다. 화면에는 A클래스 최우수자 명단과 그 옆에 열람 기록이 표시돼 있었다. 조은아라는 이름이 최근 사흘간 계속 같은 항목을 열람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항목 제목은 '강지우 신입생 종합 데이터'. "조은아가 누군데." "조가(趙家) 장녀예요. A클래스 최우수자고, 이서연이랑은 다른 계열이에요." "다른 계열이라니." "이서연 쪽이 전통 명문가라면, 조가는 신흥이에요. 돈은 이서연 쪽보다 많고, 인맥은 이서연 쪽보다 넓죠." '또 새로운 파벌이 등장하네.' K클래스 안에서도 세 갈래로 나뉘어 있는데, 이제는 A클래스에서까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근데 왜 내 데이터를 계속 봐." 김하린이 잠깐 화면을 넘기다가 멈췄다. "이 부분 보세요." 메모 항목에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본인 접근 불가 — 여성공포증 진단 이력, 대리 파견 검토.' 순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게 느껴졌다. 내 진단 이력이 이렇게 학교 데이터베이스에 다 올라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걸 누군가가 벌써 확인했다는 것도 몰랐다. '이게 대체 어디까지 새어나간 거야.'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숨기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내 허락 없이 누군가가 마음대로 열람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소름 돋았다. "대리 파견이라는 게 뭔데." 김하린이 태블릿을 도로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그건 저도 아직 몰라요. 근데 조은아 쪽이 뭘 준비하고 있는 건 확실해요." "확실하다는 근거는." "저 정도로 조심스럽게 접속 기록을 지우려고 한 거 보면, 뭔가 은밀하게 진행 중이라는 뜻이에요. 보통은 이렇게까지 신경 안 써요." 김하린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실려 있었다. 저 확신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김하린이 준 정보가 틀린 적이 없었다는 게 더 불안했다. 창밖으로 학교 본관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K클래스를 둘러싼 파벌은 이미 세 갈래로 갈라졌는데, 정작 가장 조용히 움직이는 쪽이 제일 위험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소리 없이 물밑에서 움직이는 게 제일 무섭다는 건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아는 법이었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는데." "일단은 조은아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는 것밖에 없어요. 먼저 움직이면 오히려 저희가 손해예요." '가만히 기다리는 것도 이제 지친다.' 매번 누군가의 다음 수를 기다리는 입장이라는 게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그날 밤, 낯선 번호로 문자 한 통이 왔다. 〈안녕하세요, 강지우 학생. 조은아입니다. 곧 뵐 것 같아요.〉 나는 그 문자를 한참 들여다봤다. 화면 밝기를 몇 번이나 낮췄다 올렸다 하면서 문장을 다시 읽었다. 뭘 준비하고 있다는 건지, 곧 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이 학교에 조용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거였다. 답장을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손가락이 한참 화면 위에서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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