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신발장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 안에 얌전히 접혀 있던 쪽지를 보고도 한동안 손을 뻗지 못했다. 아침 햇살이 신발장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와 흰 종이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평범한 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종이 끝이 왠지 날카롭게 느껴졌다. 조심스레 펼쳤을 때,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던 걸 지금도 기억한다.
[하늘 언니 옆에 앉았다고 착각하지 마.]
삐뚤빼뚤한 글씨였지만 그 안에 담긴 냉기는 또렷했다. 누가 썼는지, 왜 썼는지, 짐작조차 안 갔다. 나는 쪽지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도 한참을 신발장 앞에 서 있었는데, 그 몇 초의 정적 속에서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걸 느꼈다. 결국 교실에 도착해서야 상황의 전말을 어렴풋이 파악하게 되었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시선이 쏟아졌다. 정확히는, 내가 앉을 자리 쪽으로. 나는 그 시선들을 못 본 척하며 자리에 가서 앉았고, 옆에 앉은 서하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하늘 팬클럽이라고, 진짜로 있어?"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 어깨의 움직임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마치 수백 번은 반복해온 동작 같았다.
"여고 다닐 때부터 있었어. 이름이 뭐였더라, '하늘회'였나."
서하늘의 말투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 심드렁했지만, 나는 그 무심함 뒤에 뭔가 익숙해진 피로감이 배어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의 손끝이 책상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게 꼭 지루한 화제를 빨리 넘기고 싶어 하는 신호처럼 보였다.
쉬는 시간마다 그녀의 책상 주변으로 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하늘에게 간식을 건네거나 사소한 부탁을 하며 애정을 표현했는데, 그 애정의 방식이 남학생이 남학생 후배를 대하는 방식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누군가는 초콜릿을 슬쩍 책상 위에 올려두고 도망가듯 자리로 돌아갔고, 누군가는 별거 아닌 질문을 던지며 하늘의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언니, 오늘도 멋있어요."
한 여학생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하늘은 익숙하게 손을 들어 그 아이의 머리를 슥 쓰다듬었다. 그 손짓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고, 오히려 오랜 세월 다져진 능숙함이 배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묘한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분명 같은 여자인데, 저 손짓 하나로 공기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지는 게, 그게 낯설면서도 어딘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로 진학했다는 하늘의 이력을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그녀가 왜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170cm에 이 얼굴, 이 목소리로 여중, 여고를 나왔으니 당연히 그렇게 되는 거지."
같은 반 남학생이 귓속말로 설명해줬을 때, 나는 그 말투에서 은근한 부러움과 경계심이 동시에 느껴져서 조금 불편했다. 그는 하늘 쪽을 흘깃 보며 덧붙였다.
"쟤한테 고백한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대. 근데 다 정중하게 거절당했다더라."
"거절을?"
"어.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다 받아주는 척하면서 아무도 안 받아준대. 그게 더 무섭다니까."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어쩐지 하늘의 옆얼굴을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을 받은 그녀의 눈매는 우묵했고,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서하늘은 그 역할을 스스로 원해서 맡은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어진 자리에 순응해온 듯했다. 그녀가 팬클럽 아이들에게 다정하게 대할 때조차, 어딘가 의무적인 태도가 배어 있었다는 걸 나는 눈치챘다. 웃는 얼굴 뒤에 숨겨진 그 옅은 권태로움이, 마치 매번 같은 무대에 올라가야 하는 배우의 표정 같아서, 나는 그걸 보고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귀찮지 않아?"
내가 조심스레 묻자,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가 짧게 답했다.
"익숙해."
그 한 단어에 담긴 무게가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익숙하다는 말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포기와 인내가 쌓여 있어야 나올 수 있는 말인지, 나는 그때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점심시간, 급식실 앞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그 벽을 체감했다.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는데, 여학생 세 명이 나를 둘러싸고, 노골적으로 시비를 걸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네가 뭔데 하늘 언니 옆에 앉아."
그중 가장 키가 큰 여학생이 팔짱을 끼며 물었고, 나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손에 든 식판이 미세하게 흔들렸는데, 그게 긴장 때문인지 그저 무게 때문인지 나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자리는 그냥 번호대로 정해진 건데."
내 대답은 옹색했고, 그 옹색함이 그들의 비웃음을 더 부추겼다.
"흥, 번호 핑계 대지 마. 어차피 곧 바뀔 텐데."
여학생 중 하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는데, 그 말이 실제로 반영될까 봐 내 가슴이 조금 조여드는 걸 느꼈다. 뒤에서 누군가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웃음소리가 마치 나를 향한 판결처럼 느껴져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언니한테 함부로 말 걸지 마. 네가 무슨 자격으로."
또 다른 여학생이 덧붙였을 때, 나는 문득 이 모든 게 얼마나 낯선 규칙인지를 실감했다.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겪어본 적 없는, 무언의 서열과 영역 표시 같은 것들이 이 급식실 앞에서 고스란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서하늘이 나에게 다가와 뜻밖의 말을 건넸다.
"신경 쓰지 마."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확고했다. 나는 그 확고함이, 오랜 시간 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겪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담담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서하늘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녀가 이미 이런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봤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짜증도, 당황도 없었다. 그저 익숙한 절차를 처리하듯 무심한 얼굴이었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어리석었다, 나는 그저 이 상황이 불편하다는 것에만 신경 쓰고 있었지,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런 벽 안에서 살아왔는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는 걸, 나는 한참 뒤에야 깨달았다.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들을 곱씹었다. 창밖에서는 늦가을 바람이 창틀을 흔들었고,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서 잠이 오지 않았다. 신발장 속 쪽지, 팬클럽 아이들의 눈빛, 급식실 앞에서의 대치, 그리고 서하늘의 낮은 목소리까지, 하루 동안 있었던 장면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떠돌았다.
왕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녀와, 그 왕자의 옆자리에 앉게 된 나. 이 조합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선과 견제를 불러올지, 그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이 상황이 며칠 안에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거라고, 별다른 근거도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담임선생님이 종례 시간에 던진 한마디가, 그 견제를 한층 더 노골적으로 만들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