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아침부터 사물함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이 학교에서 저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이준서."
뒤도 안 돌아봤다.
또 시작이었다.
가방에서 교과서를 꺼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못 들은 척하는 게 제일 낫다는 걸 이미 몇 달 전에 배웠다.
"안 들려? 이준서."
서다은이었다.
키 145센티, 우리 반에서 제일 작은데 목소리는 제일 크다.
아침 조회 시작 5분 전,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그 목소리에 지나가던 애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다.
오늘은 뭘로 걸어올까, 벌써 지친다.
"오늘 급식 먼저 받기 승부. 진 사람이 매점 빵 쏘기."
의자를 발로 툭 밀며 다은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가방도 안 벗은 채였다.
어제는 계단 세 칸씩 뛰어오르기였다.
그 전날은 손등 때리기 게임.
그 전전날은 급식실 앞에서 눈싸움, 지는 사람이 먼저 웃기.
다 이겼는데도 다은은 매번 또 걸어왔다.
이쯤에서 세어봐도 벌써 스무 번은 넘게 진 것 같은데, 뭘 믿고 저러는 건지.
"싫어."
짧게 대답하고 교과서를 꺼냈다.
표지가 낡아서 귀퉁이가 조금 말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왜 자꾸 도망가?"
도망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넌 한 번도 이긴 적 없잖아."
"그러니까 언젠가는 이겨야지."
말은 되는데 논리는 이상했다.
다은의 눈이 반짝였다.
이럴 때 저 눈빛이 제일 부담스럽다.
마치 이번엔 진짜라는 듯한, 근거 없는 확신이 가득 찬 눈.
박현우가 옆에서 낄낄댔다.
"둘이 진짜 못 말린다. 이거 몇 번째냐."
"몰라. 세는 것도 지쳤어."
"넌 좀 조용히 해."
현우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농구공을 굴렸다.
공이 책상 다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났다.
저 공은 대체 왜 교실에 들고 다니는 건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하루도 안 빠지고 도발해오는 여자애.
하루도 안 빠지고 다 받아주는 나.
생각해보면 나도 이상했다.
이길 게 뻔한 승부에 매번 응해주는 이유가 뭘까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다.
답은 안 나왔다.
그냥 다은이 걸어오면, 손이 먼저 반응했다.
1교시 종이 치기 전에 다은이 다시 다가왔다.
가방을 아예 책상 위에 올려놓고 팔짱을 낀 채였다.
"오늘 안 하면 내일도 올 거야."
"매일 오잖아."
"매일 갈 거야, 이길 때까지."
그 말을 들으니 문득 짜증이 확 올라왔다.
이게 벌써 몇 달째지.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꾹 눌렀다.
1학년 겨울부터 시작된 이 지긋지긋한 승부가.
처음엔 장난이었는데 이제는 습관이 됐고, 습관은 어느새 일상이 됐다.
내가 학년 1등을 놓치면 안 되는 이유는 다은이 모른다.
아버지와의 약속.
- "성적 유지 못 하면 그날로 강릉 내려온다. 알겠지."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그 낮은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성적을 지켜야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수 있다.
못 지키면 강릉 본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그 압박 속에 사는 나한테, 매점 빵 내기 같은 건 사치였다.
다은은 그걸 모르니까 저렇게 가볍게 웃으며 다가올 수 있는 거겠지.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말해놓고 나서야 아, 이건 좀 다른 방향인데 싶었지만 이미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뭘."
다은이 팔짱을 풀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기말고사."
다은의 눈이 커졌다.
저렇게 눈이 커지는 것도 처음 보는 것 같다.
"성적으로 붙자고?"
"네가 이기면 뭐든 들어준다. 내가 이기면 다시는 승부 걸지 마."
조건을 내뱉는 순간에도 나는 자신 있었다.
다은은 하위권이었다.
전교 꼴찌를 다투는 수준이라고 소문이 났을 정도였다.
지난 중간고사 성적표를 언뜩 본 적이 있는데, 평균이 두 자릿수 초반이었던 것 같다.
내가 질 리는 없었다.
이 정도면 이 지겨운 승부의 끝을 볼 수 있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한 번쯤은 확실하게, 다시는 사물함을 쾅 소리 나게 열지 못하도록.
"진짜지?"
"어."
"약속했다."
다은이 손을 내밀었다.
작은 손이었다.
손끝이 유난히 차가웠던 게 기억에 남았다.
악수를 하며 나는 웃었다.
어차피 끝날 게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손을 잡는 순간, 다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장난기가 사라지고 뭔가 다른 게 눈에 스쳤다.
뭐지, 저 얼굴.
늘 웃고 있던 얼굴에서 웃음이 싹 걷힌 그 짧은 순간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마치 뭔가를 다짐하는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표정이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의 시작이라는 걸.
"그럼 오늘부터 공부한다."
다은이 자리로 돌아가며 중얼거렸다.
혼잣말인데 다 들렸다.
목소리 크기 조절이 안 되는 애답게, 혼잣말도 반쯤 소리로 나온다.
웃음이 났다.
서다은이 공부라니.
한 달도 못 가서 그만둘 거라 확신했다.
지금까지 스무 번 넘게 승부를 걸어놓고, 매번 결과에 별로 신경도 안 쓰던 애가 갑자기 기말고사 성적을 걸었다는 게 어울리지 않았다.
1교시 담임이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됐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필기를 시작했다.
칠판에 적히는 판서를 따라 손을 움직이는데, 평소보다 글씨가 삐뚤빼뚤했다.
그런데 자꾸 뒷자리가 신경 쓰였다.
등 뒤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 연필 굴리는 소리.
평소라면 신경도 안 썼을 소리들이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은이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교과서를 펴놓고 있었다.
연필을 쥔 손이 어색해 보였다.
글씨를 쓰다가 지우고, 다시 쓰다가 또 지우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저렇게 진지한 얼굴로 책을 들여다보는 다은은 처음 봤다.
설마.
아니야, 라고 생각하려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웅웅거렸다.
나는 다시 앞을 보려 했지만 시선이 자꾸 뒤로 향했다.
연필 끝을 물었다가 다시 종이에 대는 다은의 옆모습이, 이상하게 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한 달도 못 갈 거라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계속 마음이 쓰이는 건지, 그건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