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1등 했더니 남친이 전학이라니

5화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마지막 시험 과목은 과학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맑았다. 이상하게 그 파란색이 눈에 박혔다. 종료 벨이 울리자 온 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났다." 현우가 팔을 쭉 뻗으며 소리쳤다.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 필통 지퍼 여닫는 소리,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소리.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교실 전체를 채웠다. 나는 답안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제출했다. 자신 있었다. 다섯 과목 전부 실수 없이 풀었다고 생각했다. 서술형 문제도, 함정이 있던 4번 문제도 다 맞았다는 확신이 있었다. 이번엔 진짜 1등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을 챙기려는데 뒷자리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돌아봤다. 다은이 답안지를 든 손을 떨고 있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 "어, 어." 대답이 어색했다.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뭔가 이상했지만 시험 끝난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다은은 원래 시험 끝나면 늘 이런 식으로 멍했으니까.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은 옆을 지나가며 다시 물었다. "진짜 괜찮아? 얼굴이 하얘." "괜찮다니까." 짧게 자르는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평소 다은이라면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받아쳤을 텐데. 그냥 넘겼다. 시험이 끝났다는 기쁨이 더 컸으니까. 채점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온다고 했다. 그 사이 다은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급식실에서도 밥을 반쯤 남기고 일어났다. 쉬는 시간엔 창밖만 보고 있었다. 말을 걸면 대답은 했지만 그 대답이 껍데기 같았다. 스터디 시간에도 문제집을 펴놓기만 하고 잘 풀지 않았다. 펜을 쥔 손이 문제집 위에서 멈춰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디 아파?" "아니." "표정이 안 좋은데." "그냥 좀 피곤해서." 대답을 대충 넘겼지만 마음에 걸렸다. 집에 가는 길에도 그 걸린 마음이 계속 따라왔다. 뭔가 말하고 싶은데 못 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그게 뭔지 나는 끝까지 몰랐다. 일주일 뒤, 성적표 발표일이었다. 아침부터 교실 분위기가 달랐다. 다들 초조한 얼굴로 서로 눈치를 봤다. 누구는 벌써부터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고, 누구는 애써 태연한 척 딴 얘기를 했다. 담임이 조회 시간에 성적표를 나눠주며 말했다. "이번 기말고사 전교 1등, 서다은." 교실이 순간 정적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칠판 위 시계 초침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뭐?" 누군가 외쳤다. 반 아이들이 다 놀란 얼굴로 다은을 쳐다봤다. 나도 귀를 의심했다. "서다은이 1등이라고요?" "그래, 전 과목 평균 최고점이야. 대단하다, 다은아." 담임이 웃으며 다은의 성적표를 흔들었다. 다은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표정이 하얘져 있었다. 손에 든 펜을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축하받아야 할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나는 내 성적표를 확인했다. 2등. 숫자 하나가 눈에 콱 박혔다. 다시 봐도 2등이었다. 1등을 놓쳤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주변 소리가 갑자기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누가 뭐라고 웅성거리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1등을 놓치면. 아버지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1등을 유지하지 못하면 강릉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 말을 아버지가 처음 꺼냈던 날의 목소리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 다음 시험에서도 1등 못 하면 그날로 짐 싸.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성적표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준서, 왜 그래?" 현우가 옆에서 물었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입이 안 떨어졌다. 다은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듯 나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다은의 얼굴이 무너졌다. "준서야." 작게 부르는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아?" "뭐가." "너, 1등 놓친 거..." 다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 아이 하나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준서 이번에 1등 놓쳤으니까 이제 강릉 내려가나?" 가벼운 말투였다. 그냥 지나가는 소리처럼. 그런데 그 말이 교실 전체에 퍼졌다. "강릉? 그게 뭔데?" "몰라? 준서 아버지랑 약속했잖아, 1등 못 하면 전학 간다고." 수군거림이 순식간에 커졌다. 다들 아는 얘기였구나. 나만 몰랐던 것처럼 느껴졌다. 다은의 얼굴이 완전히 하얘졌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진짜야?" 다은이 나를 붙잡고 물었다.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톱이 내 팔에 박힐 정도로 세게 쥐었다. "...진짜야."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다은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가, 내가 이겨서." 말을 끝내지 못했다. 다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내가 너 전학 보낸 거야?" 그 순간 교실이 조용해졌다. 모두가 우리 둘을 쳐다봤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다은아." "미안해. 나 몰랐어. 이럴 줄 몰랐어." 다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큰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반 아이들이 다 놀랐다. "다은아, 잠깐." 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다은이 교실을 뛰쳐나갔다. 복도로 사라지는 작은 뒷모습이 흔들리고 있었다. 뛰어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교실 안이 순식간에 시끌시끌해졌다. "뭐야, 저거." "준서 진짜 전학가?" "서다은 왜 저래." 여기저기서 터지는 말들이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남았다. 현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쫓아가야지, 뭐 하고 있어."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바닥에 못 박힌 것처럼 발이 안 떨어졌다. 1등을 놓쳤다는 사실. 아버지가 곧 전화할 거라는 사실. 다은이 그 충격에 뛰쳐나갔다는 사실. 모든 게 한꺼번에 몰려왔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켰다. 어느 하나도 제대로 정리가 안 됐다. "준서야, 정신 좀 차려." 현우가 다시 어깨를 흔들었다. 그 손길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가방도 챙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실을 나서서 복도를 뛰었다. 다은의 이름을 부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다은아!"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대답이 없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어 내려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1층 현관 앞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정장을 입은, 딱딱한 얼굴의 중년 남자였다. 현관 유리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그 사람 얼굴 반쪽을 가리고 있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아버지였다. 생각보다 빨리 왔다. 다은을 찾아야 하는데, 발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리가 다시 무거워졌다. 방금까지 뛰던 다리가 갑자기 땅속에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눈빛에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준서야." 낮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성적표 봤다." 짧은 그 말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숨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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