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도사 손자, 낙제생이 되다

3화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본 순간, 몸이 먼저 굳었다. 푸른빛. 별채 창문 틈으로 흘러나오는 그 빛은 형광등이나 손전등 같은 게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마치 물속에서 보는 불빛처럼, 경계가 흐물흐물 움직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밤바람이 마당을 훑고 지나갔다. 서늘했다. 그런데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는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저게 뭐예요?" 목소리가 내 것 같지 않았다. 갈라져 있었다. "모르겠다. 저런 건 처음 본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확신 없는 떨림이 실렸다. 천 년을 지켜왔다는 사람이 저런 목소리를 낸다는 게, 오히려 더 무섭게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모른다고 말하는 걸, 나는 처음 들었다. 이 집에서 나고 자라며 수없이 들었던 말이 있었다. 이 집의 물건은 다 이유가 있어서 자리에 있는 거다, 함부로 만지지 마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그냥 오래된 골동품이겠지, 하고. 그런데 지금 저 빛을 보니, 그 웃음이 얼마나 얕았는지 알 것 같았다. 별채 안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거 그냥 골동품 아니었어?" "만지지 마, 새꺄. 뭔지도 모르는데." "이미 만졌는데 뭘." 남자들의 목소리가 뒤섞였다. 몇인지 가늠이 안 됐다. 셋, 아니면 넷. 발소리가 여러 겹으로 엉켜 마루를 울렸다. 그중 한 명이 문을 밀고 나왔다. 손에 든 거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거울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그 작은 물건에서 나오는 빛이 마당 전체를 물들일 만큼 강했다. "이거 뭔가 이상한데." 남자가 거울을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손목이 이상하게 꺾여 있었다. 놓으려는 게 아니라, 놓을 수 없어서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놔, 놔야 되는데 안 놔져!"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다른 남자들이 몰려들었다. 하나는 삽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손전등을 든 채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 순간 앞으로 나섰다. "당장 그 거울 내려놓아라."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나는 그 목소리에서 평소의 할아버지를 다시 찾은 것 같아 조금 안심했다. 그 안심이 얼마나 짧게 끝날지는 그때는 몰랐다. 남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뭐야, 늙은이잖아." 한 명이 비웃었다. 손전등 불빛이 할아버지의 흰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이 거울, 원래 주인장인가 보네." "내려놓으라 했다." 할아버지가 다시 말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낮고 거친 웃음이었다. "할아버지, 이거 팔면 얼마나 받는지 알아요? 이러다 다치실 텐데." 거울을 든 남자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빛은 점점 강해졌다. 그 빛이 남자의 팔을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손등에서 시작된 빛이 팔뚝을 지나 어깨까지 번졌다. "저거, 저거 놓칠 것 같은데?" 다른 남자가 삽을 들어 올렸다. 삽 끝이 무디게 반짝였다. 오래 쓴 흙 자국이 삽날 곳곳에 말라붙어 있었다. 그 삽으로 흙을 파던 사람이, 이제는 그걸로 사람을 겨누려 하고 있었다. "놓치기 전에 늙은이부터 치워야지."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가 사라졌다.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 소리를 질러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 모든 생각을 뭉개버리는 단 하나의 감각. 할아버지가 위험하다. "할아버지!" 나는 그 말을 뱉으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판아, 안 돼!" 할아버지의 외침이 뒤늦게 귓가를 때렸다. 그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나를 향한 두려움이었다. 삽을 든 남자가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그 눈이 나를 향했다. "뭐야, 애도 있었네." 남자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나쁜 웃음이었다. 술 냄새가 섞인 숨결이 마당까지 퍼지는 것 같았다. "비켜."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무섬을 삼키며 뱉은 말이었다. "비키긴 뭘." 남자가 삽을 고쳐 잡았다. 손잡이를 쥔 손가락이 하나씩 접히는 게 보였다. 그 순간 알았다. 이 사람은 진짜로 휘두를 생각이라는 걸. 협박이 아니라는 걸. "할아버지, 뒤로 가세요!" 나는 소리쳤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할아버지를 밀치듯 앞으로 나섰다. 발밑의 흙이 미끄러웠다. 밤이슬에 젖은 마당이었다. 그 미끄러움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한 번. 삽이 허공을 갈랐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남았다. 피할 자리가 없었다. 아니, 있었을지도 모른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면, 아니면 뒤로 물러섰다면.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할아버지를 지켜야 한다. 두 번. 삽이 다시 올라갔다. 남자의 팔에 힘이 실렸다. 어깨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이번엔 못 피해." 남자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웃지 않았다. 대신 두 팔을 벌려 할아버지 앞을 막았다. "판아, 비켜라!" 할아버지의 외침이 귓속에서 흩어졌다. 이미 늦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몸은 이미 그 자리에 굳어 있었고,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 번째 휘두름은 없었다. 두 번째로 충분했다. 콰악. 삽날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소리는 이상하게 둔탁했다. 상상했던 통증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뜨겁다기보다 차가웠고, 아프다기보다 텅 비어가는 느낌이었다. 몸이 뒤로 밀려났다. 시야가 흔들렸다. 마당의 밤하늘이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판아!"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마치 물속에서 듣는 소리처럼. 모든 소리가 한 겹의 막을 통과해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무릎이 꺾였다. 바닥이 차가웠다. 손바닥이 흙바닥에 닿았고, 그 감각만이 이상하게 생생했다. 주변에서 남자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야, 이거 진짜야?" "몰라, 빨리 챙겨서 뜨자!" 발소리가 급하게 멀어졌다. 그들은 도망치고 있었다. 거울에서 나오던 빛도, 그들과 함께 멀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이미 내 관심 밖이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평소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얼굴이, 지금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판아, 판아! 정신 차려라!" 할아버지가 나를 끌어안았다. 손이 뜨겁게 상처를 짓눌렀다. 그러나 그 손끝에서 뭔가가 흘러나가는 게 느껴졌다. 피, 라고 생각했다. 피가 이렇게 많이 흐르는데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하나씩 내려놓는 것처럼. "할아버지."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미안해요. 제가 앞으로 나서서." "말하지 마라, 힘 아껴라!"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나는 그 갈라진 목소리를 들으며, 이상하게도 어릴 때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넘어져서 무릎이 깨졌을 때, 할아버지가 지금과 똑같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던 기억이었다. 그때는 상처가 손톱만 했는데도 저렇게 다급했었다.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마당의 나무들이, 기와지붕이, 할아버지의 얼굴이 모두 뭉개지듯 흔들렸다.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그냥, 조금 아쉬웠다. 아버지한테 마지막으로 화 안 낼걸. 그런 생각이 스쳤다. 며칠 전 전화로 다퉜던 게 마지막 대화였다. 별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화가 났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옷을 벗듯이, 내 몸이 저 아래에 남고 나는 위로 떠오르는 느낌. 내려다보니 할아버지가 내 몸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그 어깨가 들썩이는 게, 아주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판아! 눈을 떠라, 판아!" 그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마당의 불빛도, 별채의 잔광도, 할아버지의 흰머리도 모두 아래로 가라앉듯 작아졌다. 나는 죽었다. 그 사실을, 이상하게도 아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