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가 왜 라스보스랑 친구야

1화

빗길이었다. 신호는 분명 파란불이었고, 나는 우산도 없이 편의점 봉투를 흔들며 걷고 있었다. 삼각김밥 두 개, 캔커피 하나. 야근 끝나고 먹을 야식이었다. 편의점 알바생이 "오늘도 늦게 가시네요" 하고 웃어줬던 것까지 기억난다. 그게 내 마지막 쇼핑 목록이었다는 게 지금도 좀 서글프다. 참치마요랑 불닭마요였는데. 둘 다 못 먹었다. 트럭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가득 채운 순간, 나는 아, 하고 생각했다. 그냥 아, 였다. 무섭다거나 억울하다거나 그런 복잡한 감정은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까. 브레이크 밟는 소리도 못 들었다. 그냥 빛, 그리고 끝.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 나는 울고 있었다. 정확히는 울음소리가 내 목에서 나오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치 내 몸이 아니라 리모컨으로 조종되는 인형처럼, 목구멍에서 울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시야는 온통 흐릿했고 손발은 내 것 같지 않게 작았다. 손가락을 움직여보려 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발가락은 아예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천장은 낯선 나무 서까래였고, 누군가 나를 안아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렸다. 와. 이건 뭐지. 나는 그 순간까지도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내 뇌가 이상하게 또렷했다는 거다. 갓난아기라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어야 정상 아닌가. 인터넷에서 본 육아 정보에 따르면 신생아는 사물 인식도 제대로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런데 나는 방금 트럭에 치여 죽은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고,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안겨 울고 있다는 사실도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내 심장이 이 조그만 몸 안에서 미친 듯이 뛰고 있다는 것까지 느껴졌다. 환생이라니. 나는 생각했다. 진짜로, 진짜로 환생이라니. 와, 이거 완전 웹소설 클리셰 아니야. 나 방금까지 회사에서 엑셀 돌리다 죽은 사람인데. 트럭에 치여 환생. 진짜야? 이게 진짜 나한테 일어난 거야? 그런데 그보다 더 소름 끼치는 건, 이 방의 구조였다. 낮은 목조 천장, 벽에 걸린 십자가 비슷한 성표, 저 멀리서 들리는 아이들 떠드는 소리와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창밖으로 언뜻 보이는 회색빛 하늘과 낡은 나무 울타리까지.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인데. 설마. 나는 전생에 게임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순정 판타지 게임 '가시관의 영애'를 좋아했다. 대학 시절부터 회사원이 되어서도 그 게임만은 놓지 못했다. 야근하다가도 화장실 가서 몰래 이벤트 씬 돌려본 적도 있다. 스토리 좋고, 캐릭터 좋고, 특히 라스보스 영애가 압도적으로 좋았던 게임. 그 게임의 초반 배경이 딱 이런 고아원이었다. 배경 컨셉아트로 스틸컷 한 장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딱 이 느낌이었다. 목조 천장, 낡은 성표, 삐걱거리는 계단. 말도 안 돼. 나는 울음을 그쳤다. 정확히는 상황 파악을 하느라 순간적으로 멍해졌는데, 그걸 나를 안고 있던 사람은 아기가 갑자기 조용해진 걸로 받아들였는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수녀복 비슷한 옷을 입은 중년의 사람이었다. 성별이 딱 구분되지 않는, 부드럽고 다정한 얼굴이었다. 눈가에 잔주름이 있었고, 손등에는 오래 일한 사람 특유의 거친 흔적이 있었다. "아이고, 요 녀석 이제야 그치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완전히 확신했다. 은강 마을 고아원. 게임 초반 튜토리얼에 잠깐 나오는 배경. 여기서 주인공은 어린 시절 몇 줄의 텍스트로만 스쳐 지나가고, 정작 이야기는 왕궁 학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는 그 게임을 몇 번이나 반복 플레이했는지 모른다. 정확히 세보진 않았지만 스무 번은 넘었을 거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집에 와서 이 게임 켜고 마음을 달랬으니까. 모든 루트, 모든 엔딩을 다 봤다. 그리고 그 모든 엔딩에서 예외 없이 파멸하는 캐릭터가 있었다. 선우하영. 검은 머리, 검은 눈. '사신의 검은 마력'을 지녀 세상 모두가 두려워하는 영애. 어느 루트를 타든 결국 미쳐버리거나 살해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 게임에서 가장 슬픈 캐릭터. 공식 일러스트에서도 항상 어두운 배경에 홀로 서 있는 모습으로만 그려졌다. 팬들 사이에서도 "구원 불가 캐릭터"로 유명했다. 커뮤니티에 하영이 관련 글 올라오면 다들 댓글로 "또 죽었네" 하고 눙치곤 했다. 나는 그 캐릭터를 사랑했다. 정확히는 안타까워했다. 공략도 안 되고 구원도 안 되는 캐릭터인데, 매 회차마다 나는 그녀의 결말 앞에서 마음이 무너졌다. 어떤 루트에서는 광장에서 화형당했고, 어떤 루트에서는 스스로 검을 목에 꽂았다. 가장 최악의 루트에서는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 손에 죽었다. 게임 안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었다. 시나리오 라이터가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거였다. 절대악, 절대 파멸. 그게 선우하영이라는 캐릭터의 존재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 세계에 다시 태어났다. 이름조차 없던, 대사 한 줄 없던 조연으로. 나는 그날 밤, 낯선 아기의 몸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생각했던 걸 지금도 기억한다. 이건 그냥 게임이 아니라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잖아. 젠장. 삼각김밥도 못 먹고 죽었는데, 이제는 세계관 최종보스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로또도 안 되던 인생이 죽고 나서야 대박 시나리오에 캐스팅된 셈이다. 그것도 하필 조연으로, 대사 한 줄 없는 그런 위치로. 인생 참,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대충 그림처럼 그려졌다. 이 고아원에서 자라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선우 공작가 사람들이 찾아와서 하영을 데려가는 그 장면. 게임 텍스트로는 딱 세 줄 나온다. "어린 하영은 낯선 마차에 태워졌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은강의 풍경이었다." 딱 그거였다. 그 뒤로 하영의 유년기는 완전히 블랙박스였다. 아무도 몰랐다. 게임에서 다루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제 그 블랙박스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이 블랙박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에 따라, 그 캐릭터의 파멸을 막을 수도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거다. 물론 지금 당장은 손가락 하나도 마음대로 못 움직이는 갓난아기 신세였지만. 그날부터 나는 이도윤이라는 이름의, 은강 마을 고아원 소속 갓난아기로 다시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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