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백작가에서 널 초청했다."
원장님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던 손이 저절로 멈췄다. 아침 햇살이 마당 흙바닥에 부서지고 있었는데, 그 순간엔 그 반짝임조차 눈에 안 들어왔다.
"백작가요? 어디 백작가요?"
"은강 백작가. 이 마을을 다스리는 그 백작님이시란다."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은강 백작. 게임 속에서 선우재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인물. 그리고 그 사람의 딸이 바로 선우하영이었다.
와.
드디어.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몬스터 레이드 앞두고 파티 모집 뜬 것도 아닌데, 손바닥에 땀이 다 났다.
원장님은 내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백작님께서 따로 사람을 보내셨어. 외동딸이 있는데, 그 아이가 또래 친구가 없다고. 마을에서 아이를 하나 추천해달라 하셨단다."
"그런데 왜 저예요?"
이건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은 거였다. 고아원에 애가 나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나를 지목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당장 옆방에 사는 재이도 있고, 나보다 힘도 세고 눈치도 빠른 형들도 수두룩한데.
원장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네가... 요즘 검술을 잘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더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백작님께서 원하시는 건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딸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아이였어. 다른 애들은... 미안하지만 소개하기가 좀 어려웠단다."
나는 그 말속에 숨은 뜻을 대충 알아챘다. 다른 애들은 백작가라는 이름 앞에서 겁먹거나, 반대로 그 이름을 이용해먹으려 들 게 뻔했다. 백작가 딸 친구 자리 하나 얻으면 인생 역전이라고 생각할 애들이 한둘이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적어도 그럴 애로 보이지 않았던 거겠지.
원장님의 눈에는 미묘한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너한테 좋은 기회이기도 하지만... 그 아이가 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아이라서. 네가 힘들 수도 있어."
"특별한 사정이요?"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아이란다. 이 왕국에서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나는 알았다. 너무 잘 알았다. 그 아이가 바로 내가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난 이유이자, 구하고 싶었던 유일한 존재라는 걸.
머릿속에 게임 오프닝 컷신이 스쳤다.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궁전 복도를 걷던 어린 선우하영. 그리고 몇 회차 뒤, 그 새하얀 드레스가 검은 피로 뒤덮이던 장면. 정화되지 못한 채 무너져가던 그 아이의 눈동자.
"저주받은 아이라고 불리는 거요."
원장님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구나."
"그냥... 들은 것 같아요."
사실 나는 이 세계에 태어나기 전부터 그 아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 그 아이가 몇 번의 회차 동안 얼마나 처절하게 파멸했는지, 얼마나 외롭게 죽었는지도. 정화 엔딩을 보려고 나는 몇 번이나 세이브 파일을 지웠다가 다시 시작했던가. 그런데 지금, 진짜로 그 아이가 눈앞에 있다.
"도윤아, 이건 강요가 아니야. 네가 원하지 않으면 다른 아이를 찾아볼게."
원장님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손끝으로 앞치마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계속 나를 살폈다.
나는 원장님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갈게요."
"정말로?"
"네. 가고 싶어요."
원장님은 내 대답에 안심한 것도 같고, 동시에 더 걱정스러운 것도 같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 보니까 괜히 죄송해졌다. 이 사람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서 대답하는지 절대 모를 테니까.
"조심해야 한다. 백작가는... 명예로운 가문이지만, 그 안에 들어가면 우리랑은 다른 세계란다. 그리고 그 아이는... 사람들 말로는 위험한 힘을 가졌다고 하더구나."
위험한 힘. 사신의 검은 마력.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게임 속 후반부 장면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 아이가 폭주할 때마다 검은 마력이 주변을 집어삼키고, 그 대가로 그 아이 자신이 무너져가던 장면들. 마을 하나가 통째로 잿더미가 되던 엔딩도 있었다. 그 엔딩을 볼 때 나는 컨트롤러를 던지고 한동안 화면만 쳐다봤었다.
"괜찮아요. 저 검술 좀 하잖아요."
나는 일부러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검술이라고 해봐야 마을 대장장이 아저씨한테 어깨너머로 배운 목검 몇 번 휘두른 게 전부였지만, 지금 이 순간엔 그런 디테일은 아무래도 좋았다.
원장님은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작게 웃었다.
"그래, 그럼 준비하자. 백작가에서 사흘 뒤에 사람을 보내기로 했으니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원장실 밖에서 애들 몇이 우르르 몰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문틈으로 얼핏 보인 재이의 표정은 반은 놀람, 반은 부러움이었다. 나는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 다른 애들의 시선이 유독 나한테 꽂혔다. 누구는 대놓고 "너 이제 우리랑 안 놀아줄 거야?" 하고 물었고, 누구는 "백작가 가면 맛있는 거 많이 먹겠다, 좋겠다" 하며 툴툴거렸다. 나는 그냥 웃으면서 밥그릇을 비웠다.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
그날 밤, 나는 다시 창고 옆 계단에 앉아 별을 봤다. 사흘 뒤면 나는 게임 속 최종보스를 실제로 만나게 된다.
바람이 찼다. 계단 돌바닥의 냉기가 엉덩이를 타고 올라오는데도, 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하늘엔 별이 유난히 또렷했다.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 제일 맑은 밤인 것 같았다.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두려움인지 기대감인지 구분이 안 됐다. 게임 속에서 그렇게 수십 번 죽어나가던 그 아이를, 이번엔 진짜로 구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구한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건지조차 나는 아직 정확히 몰랐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것.
그리고 나는, 사흘 뒤 그 저택 문 앞에서 내가 얼마나 순진한 각오를 하고 있었는지를 아주 뼈저리게 깨닫게 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