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내가 왜 라스보스랑 친구야

3화

성민을 넘어뜨린 그 순간부터, 내 안에서 뭔가가 확실히 달라졌다는 걸 느꼈다. 손목을 잡던 감각, 상대의 중심을 무너뜨리던 각도, 넘어뜨리는 타이밍까지. 다섯 살, 이제 여섯 살이 된 몸이 할 수 있는 동작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몰래 손을 움직여보며 생각했다. 이거 검술이잖아. 정확히는, 게임 속 남주 후보 캐릭터들이 쓰던 기본 검술 폼이었다. 나는 전생에 그 게임의 전투 신을 셀 수 없이 돌려봤다. 대사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스킵도 안 하고 몇 번씩 클리어했으니까. 특히 3번 남주였던 이안의 검술 폼은 거의 외우다시피 봤다. 그런데 그게 지금 내 몸에서,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재현되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닌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손목을 몇 번 더 돌려봤다. 발목의 각도, 무릎을 굽히는 정도, 손끝에 실리는 힘의 방향까지 전부 기억났다. 마치 몸속에 저장된 데이터를 그대로 불러오는 느낌이었다. 게임 캐시 파일이 여섯 살짜리 몸에 깔려있는 셈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 뒤로 며칠간 조용히 실험을 했다. 나뭇가지를 쥐고 마당 구석에서 혼자 휘둘러보고, 발 디딤을 바꿔보고, 균형을 잡는 각도를 조정해봤다. 처음엔 손이 떨렸다. 여섯 살짜리 팔뚝으로 나뭇가지를 제대로 휘두르는 것도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팔의 떨림이 사라지고, 대신 궤적이 또렷해졌다. 나뭇가지 끝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나뭇가지치고는 제법 날카로웠다.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전생의 게임 지식이 이 몸의 근육과 신경을 통해 재현되고 있었다. 나는 그걸 확인할 때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왜 지금 이 시점에서 각성했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다만 짐작은 있었다. 극한의 스트레스, 생존의 위협 앞에서 몸이 본능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낸 거라면, 그 방법이 하필 내 전생 기억 속에 저장된 검술 데이터였던 거겠지. 다른 사람은 위기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던데, 나는 초인적인 검술 폼이 나온 셈이다. 이게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아직 판단이 안 섰다. 조숙한 판단력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유치한 다툼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이,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버릇이 생겼다. 누가 나를 괴롭히려는지, 어떤 타이밍에 원장님이 순찰을 도는지, 어떤 말을 하면 상대가 물러서는지. 심지어는 밥 먹는 순서만 봐도 그날 누구 기분이 안 좋은지 알 수 있게 됐다. 서른 넘게 살았던 어른의 사고방식이 여섯 살짜리 몸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번은 아이들이 간식을 두고 싸우는 걸 봤다. 과자 한 봉지를 두고 셋이 서로 잡아당기며 소리를 지르는데,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저거 그냥 셋으로 나누면 되는데. 굳이 저렇게 싸우나.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여섯 살짜리가 저런 생각을 하는 게 정상이 아니라는 걸. 성민은 그날 이후로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두려워했다. 다섯 살짜리한테 나뒹굴었다는 게 자존심에 상처였는지, 오히려 나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눈을 피하고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노골적인지, 다른 애들도 눈치를 챘다. 다른 아이들도 어느 순간부터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야, 도윤이 너 뭐야. 갑자기 왜 그렇게 세졌어?" "몰라." "몰라가 뭐야, 진짜." "매일 나뭇가지 들고 마당에서 뭐 하는 거야?" "운동." "운동이 왜 그렇게 생겼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뭐라고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전생에 게임 좀 많이 했더니 검술 데이터가 몸에 새겨져 있었다고 말하면 누가 믿겠나. 정신병원에 끌려가지 않으면 다행이지. 원장님은 이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나를 조용히 불렀다. "도윤아, 요즘 네가 좀 달라진 것 같구나." "뭐가요?" "말투도 그렇고, 애들 다루는 것도 그렇고. 마치 어른 같아." 나는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무 티 나게 굴었나 싶었다. 밥그릇 정리하는 것까지도 유심히 봤나. 그런데 원장님의 표정은 의심이라기보다는 놀라움과 걱정이 섞인 얼굴이었다. "그냥 나이보다 생각이 많은 편이에요." "그런 것 같더구나.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원장님은 뭔가 말을 더 하려다 삼켰다. 나는 그 삼킨 말이 뭔지 대충 짐작했다. 이 세계에서 너무 눈에 띄면 좋을 게 없다는 걸, 원장님도 알고 있었을 거다. 어쩌면 이 고아원에도 뭔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일곱 살이 됐다. 몸은 여전히 작았지만, 검술 실력만큼은 고아원 안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로 늘었다. 정확히는 성민을 포함한 나이 많은 애들도 나한테 대련을 걸었다가 죄다 나가떨어졌다. 한 명은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세게 휘둘렀다가 균형을 잃고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다. 다른 한 명은 내 발놀림을 따라 하려다가 다리가 꼬였다. 나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미안하지만 이건 근성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 대련이 끝나고 나면 아이들은 하나같이 흙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 눈빛에 이제는 두려움보다 존경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게 나쁘지 않았다. 여섯, 일곱 살짜리들 사이에서 무시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조금 올라갈 테니까. 그리고 그 무렵, 원장님이 나를 다시 조용히 불렀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저녁 볕이 다 빠져나간 사무실 안에서, 원장님은 창가에 서 있다가 내가 들어오는 걸 보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도윤아, 잠깐 얘기 좀 하자." 나는 그 얼굴을 보고 뭔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고, 손에는 편지처럼 보이는 종이 한 장을 쥐고 있었다. 원장님은 그 종이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접었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심장이 조금씩 빨리 뛰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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