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심판의 방은 온통 붉었다.
벽도, 바닥도, 천장까지도.
피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냥 색만 붉었다.
이상하게 조용했다.
숨소리 하나 울리지 않는 공간.
발밑을 봐도 그림자가 없었다.
신진우는 주변을 둘러봤다.
문도 없고 창도 없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였다.
여기가 어디야.
혼잣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신진우 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신진우]
[레벨: 1]
[직업: 미배정]
[스탯]
HP: 12
MP: 8
힘: 3
민첩: 4
지능: 5
마력: 2
뭐야 이거.
숫자가 너무 낮았다.
무릉 온라인 초보 캐릭터도 이것보단 나았다.
마력 2면 파이어볼도 못 쓰는 수치인데.
신진우는 게임 지식으로 상황을 되짚었다.
공략 커뮤니티에서 본 초반 밸런스표가 머릿속을 스쳤다.
최하급 전투 클래스도 마력 10은 됐다.
이건 그보다 한참 아래였다.
힘 3.
민첩 4.
지능 5.
찍어놓고 봐도 볼품이 없었다.
어디 던전 초입에서 슬라임한테 맞아 죽어도 할 말 없는 수치였다.
이게 튜토리얼이면 튜토리얼 설계자를 당장 갈아치워야 하는데.
좌절할 틈도 없이 창이 갱신됐다.
띠링.
[스킬 확인 중…]
신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스킬 하나쯔 봐줄 만하겠지, 하는 기대가 슬쩍 올라왔다.
[고유 스킬: 심판]
등급: ???
효과: 대상의 죄를 파악하고, 죄질에 상응하는 형벌을 즉시 집행한다.
뭐야 이건 또.
공격 마법은 없고 스킬은 딱 하나였다.
이름부터 수상했다.
심판이 뭔데.
혼잣말에 반응하듯 창이 확장됐다.
[심판: 대상을 지정하면 그 존재의 죄업을 스캔한다. 죄질에 따라 세 단계의 형벌이 자동 산출되며, 시전자는 집행 여부만 결정한다. 대상의 저항 불가.]
대상의 저항 불가.
그 문구가 유독 눈에 밟혔다.
신진우는 그 문장을 두 번 더 읽었다.
저항 불가.
회피 불가도 아니고, 방어 불가도 아니고, 저항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이거 스탯 창하고 완전 따로 노는 스킬인데.
공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붉은 벽 어딘가에서 인기척이 새어 나왔다.
형체가 다시 나타났다.
윤곽은 여전히 흐릿했다.
사람인지 아닌지도 구분이 안 갔다.
실망했나.
신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숨길 생각도 없었다.
좀요.
공격 마법이 이 정도면 몬스터 앞에서 숨만 쉬다 죽겠는데요.
힘 3에 마력 2로 뭘 하라는 건지.
너는 몬스터를 상대할 자가 아니다.
그럼요?
죄인을 상대할 자다.
신진우는 스킬창을 다시 봤다.
대상의 저항 불가.
죄질에 상응하는 형벌.
세 번째로 읽으니 그림이 좀 그려졌다.
이거 혹시.
짐작 가는 게 있나.
일종의 즉결심판권 아닙니까.
상대가 강하든 약하든, 죄만 있으면 그 자리에서 끝낼 수 있는.
형체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정확하다.
등급 미확인은, 아직 네가 그 힘의 한계를 시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진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공격 스탯 따위 필요 없었다.
판정만 내릴 수 있으면,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그 즉시 게임 끝이었다.
레벨 999짜리 보스가 와도 죄만 있으면 끝이라는 소린데.
이거 완전 사기 스킬이잖아.
신진우는 헛웃음을 삼켰다.
스탯창의 초라한 숫자들이 갑자기 우습게 보였다.
사기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너는 이 세계의 죄를 심판할 자로 선택됐을 뿐이다.
선택이라뇨.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형체의 윤곽이 살짝 굳었다.
그 반응이 신진우의 눈에 걸렸다.
방금 저거 뭐지.
찔린 건가.
너를 이곳에 불러들인 것은 내가 아니다.
그럼 누구요.
곧 알게 된다.
지금 너는 왕궁에 억류되어 있다.
네?
신진우가 되묻는 순간, 시야가 흔들렸다.
붉은 방이 사라지고 낯선 석조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차갑고 축축한 감옥 냄새.
곰팡이와 오래된 돌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쇠사슬이 손목을 조이고 있었다.
뭐야 이거.
신진우는 손목을 비틀어봤다.
차가운 쇠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프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방금까지 붉은 방에 있었는데.
설명도 없이 감옥이라니.
형체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멀리서 벽을 통과해 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네가 있는 곳은 대선 왕국의 지하 감옥이다.
너를 이곳에 부른 자들이 곧 찾아올 것이다.
대선 왕국.
왕국이라니, 이거 완전 판타지 세계관이잖아.
신진우는 주변을 훑었다.
축축한 돌벽, 곰팡이 낀 짚더미, 녹슨 창살.
튜토리얼 치고는 배경이 너무 실감났다.
몸에 두른 옷도 낯설었다.
게임 캐릭터 창이 뜨는데 왜 몸은 이렇게 진짜 같지.
이거 진짜 사람이 겪는 거 맞아?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 위에서, 여럿이 함께.
저벅.
저벅.
저벅.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하나가 아니라 최소 서넛은 되어 보였다.
신진우는 쇠사슬을 내려다봤다.
스탯창의 힘 3이 떠올랐다.
이걸로 어떻게 풀지.
손목을 몇 번 더 비틀어봤다.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 3짜리 팔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럼 남은 건 하나뿐이었다.
심판.
대상을 지정하면 죄를 스캔하고, 저항 불가로 형벌을 내린다.
일단 저놈들 오면 스캔부터 해보자.
죄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없으면 어쩌지.
생각을 다 끝내기도 전에 발소리가 감옥 문 앞에서 멈췄다.
철컹.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울렸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