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게임 만렙 심판자

4화

철컹. 감옥 문이 열렸다.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쳤다. 갑옷 입은 남자 셋이 들어섰다. 선두에 선 자가 검을 뽑아 목에 겨눴다. 소환자, 왕께서 부르신다. 신진우는 바닥에 웅크려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쇠사슬이 손목을 파고들었다. 차가운 감촉. 왕이 부르신다는데 안 갈 수도 없고. 신진우는 피식 웃었다. 기사들이 쇠사슬을 잡아끌었다. 질질 끌려나가는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계단을 오를수록 공기가 바뀌었다. 곰팡이 냄새 대신 향냄새가 났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 대리석 바닥. 왕좌가 있는 홀은 화려했다. 금박, 붉은 카펫, 촛대마다 불이 타올랐다. 천장에는 이 세계 신화를 그린 듯한 벽화가 있었다. 날개 달린 용, 검을 든 여신. 신진우는 그 화려함을 흘겨봤다. 돈지랄은 여기서도 하는구나. 왕좌에 앉은 남자가 신진우를 내려다봤다. 살이 오른 얼굴, 번들거리는 눈. 손가락마다 반지가 꼈고, 목에는 두꺼운 금줄이 걸려 있었다. 하윤 6세였다. 네가 그 소환된 자냐. 하윤 6세의 목소리는 느긋했다. 마치 벌레를 구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소환된 게 아니라 끌려온 거겠죠. 신진우가 되받았다. 주변 시종들이 헉 소리를 냈다. 누군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건방지구나. 하윤 6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손짓하자 옆에 있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장신에 어깨가 딱 벌어진 남자였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매서웠다. 네 손을 이리 내밀어라. 왕께서 계약 마법으로 너를 종속시키실 것이다. 계약 마법이라뇨. 신진우가 미간을 좁혔다. 속으로는 이미 짐작이 갔다. 이거 뭐 노예 계약 같은 거 아니야. 순순히 따르면 목숨은 부지한다. 기사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다. 협박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신진우는 그 순간, 시야 한쪽에 알림이 떴다. 띠링. [대상: 근위기사 카를루스] [죄업 스캔 완료] [죄질: 강제 구금 및 협박, 무고한 양민 학살 가담 (12건)] [형벌 산출: 중형 — 신체 마비] 뭐야 이거, 진짜 되네. 신진우의 눈이 반짝였다. 반신반의했던 스킬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우연히 발견한 스킬창.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반쯤 흘려봤던 문구. 죄를 지은 자를 심판한다, 라고 했던가. 카를루스가 검끝을 신진우 목에 바짝 붙였다. 차가운 쇠 감촉이 목젖에 닿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손을 내밀어라. 죽고 싶지 않은 건 그쪽 같은데. 신진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겁먹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집행. 촤르륵. 카를루스의 몸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검을 쥔 팔이 허공에 멈춘 채로 떨렸다.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뭐, 뭐야 이거! 카를루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얼굴 근육까지 굳었는지 표정이 일그러진 채 고정됐다. 하윤 6세가 왕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며 끼익 소리가 났다. 네가 한 짓이냐. 제가요? 손도 못 움직이는데 어떻게요. 신진우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손목에 쇠사슬을 그대로 매단 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속으로는 이미 다음을 계산하고 있었다. 이 스킬, 죄가 있어야 발동한다. 죄가 없는 자한테는 안 통한다는 거네. 그럼 여기 있는 놈들 중에 몇이나 걸릴까. 확인이 필요했다. 직접 실험해볼 좋은 기회였다. 하윤 6세가 손짓하자 다른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이번엔 젊은 얼굴, 표정에 망설임이 있었다. 투구를 벗어 들고 있어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청년이었다. 띠링. [대상: 근위기사 요나스] [죄업 스캔 완료] [죄질: 발견되지 않음] [형벌 산출: 불가 — 집행 대상 아님] 안 뜨네. 신진우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했다. 죄질이 있어야 걸리는 스킬이었다. 아무나 붙잡고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작정 조지는 게 아니라 골라서 조지는 거였구나. 이 자를 붙잡아라! 하윤 6세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다급했다. 요나스가 다가왔다. 발걸음이 느렸다. 칼끝이 신진우 목에 닿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신진우는 태연히 서 있었다. 왜 이번엔 안 통하는 거지. 하윤 6세가 미간을 좁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가 다시 하얗게 질렸다. 죄 없는 사람한테는 원래 안 먹혀요. 신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뭐라? 제 스킬이 그런 거라고요. 죄지은 놈만 골라서 조지는 거. 말하면서도 신진우는 속으로 웃었다. 이거 완전 사기 스킬인데. 잘만 쓰면 이 나라 절반은 내 발밑이겠는데. 하윤 6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이놈이 감히. 그때, 홀 안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폐하, 진정하시지요. 목소리가 홀 안을 울렸다. 차분하고 낮게 깔린, 그러면서도 또렷한 음성. 하얀 예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발걸음마다 예복 자락이 사락거렸다. 온화한 미소,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목에는 성물로 보이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대사제 성하율이었다. 시종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카를루스마저 눈만 움직여 그를 좇았다. 제가 이 자와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성하율의 미소가 신진우를 향했다. 부드러운 웃음이었다. 너무 부드러워서 오히려 수상했다. 신진우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봤다. 이 자식, 뭔가 있는데. 저렇게 웃는 놈치고 멀쩡한 놈 못 봤다. 속으로만 생각했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대화라면 좋죠. 신진우가 태연하게 답했다. 손목의 쇠사슬을 짤랑 흔들며 여유를 부렸다. 성하율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눈매가 더 또렷했다.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눈빛 깊은 곳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신진우는 놓치지 않았다. 띠링. 시야 한쪽에서 다시 알림이 떠오르려는 낌새가 느껴졌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반쯤 걸쳐진 문구. 이 자식은 또 뭐가 뜨려는 거지. 신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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