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문주님, 제가 수라라뇨

1화

천검문 대전은 오늘따라 유난히 차갑다.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발끝을 타고 올라온다. 겨울도 아닌데 이 정도라니. 대전의 돌들은 원래 이렇게 차가운 건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이 유독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냉기보다 더 서늘한 시선들 앞에 서 있었다. 장로들의 눈빛이 하나같이 나를 훑는다. 위아래로. 마치 물건을 감정하듯이. 익숙한 시선이다. 2년 전부터 받아온 시선이니까. "설하린." 장로 중 하나가 이름을 불렀다. 존댓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대도 아닌, 애매한 어조였다. 나이 든 자가 아랫사람을 부르는 투도 아니고, 손윗사람을 대하는 투도 아니다. 딱 그 중간, 경계하는 자의 어조였다.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예의는 챙긴다. 오락거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처세는 필요하니까. 이 세계에서 검을 놓친다는 건 삶의 낙을 통째로 잃는다는 뜻이다.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설악산 심층부에 마물 무리가 이상 집결 중이다. 규모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다." 장로가 말을 이었다. 목소리에 무게가 실린다. "본 문파는 이번 토벌의 지휘를 네게 맡기기로 했다." 순간 대전 안이 조용해졌다. 숨소리마저 죽인 것 같은 정적. 옆줄에 선 사형제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놀란 얼굴이었고,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후자 쪽이 조금 더 많았다. 나는 잠깐 내 귀를 의심했다. 지휘? 내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이 돌아간다. 심층부라면 최소 삼급 이상의 마물이 나온다는 뜻이고, 이상 집결이라면 그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뜻이다. 그런 임무의 지휘를 견습 신분에게 맡긴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저는 아직 견습 신분입니다만."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이미 여러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거 함정 아닌가. 왜 하필 나야. 다른 정식 제자들도 수두룩한데. "실력은 이미 장로회 다수가 인정했다." 다른 장로가 덧붙였다. 목소리에 은근한 조롱이 섞여 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너도 알겠지." 말끝이 묘하게 날카롭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이 뭘 시험하려는지 정도는 안다. 2년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는 그 호칭. 수라. 나는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 들었을 때는 웃겼다. 두 번째 들었을 때는 짜증이 났다. 세 번째부터는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저 검이 재밌을 뿐이다. 검을 쥐면 몸이 가벼워지고, 상대를 벨 때 머릿속이 맑아진다. 그게 다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락거리가 극도로 부족한 이 세계에서, 검술은 내가 찾은 유일한 즐길 거리였다. 텔레비전도 없고 게임도 없는 이곳에서, 검을 쥐는 순간의 그 감각만큼 짜릿한 게 없었다. 그게 왜 광기로 읽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상대를 벨 때 웃었다고 해서, 상대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에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정말 미친 거라고 할 수 있나. "거절할 수 있습니까." 물었다.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물어야 했다.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표시해야 나중에 뒤탈이 없다. "아니." 장로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이건 명령이다." 명령이라.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는 거지.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풀었다. 뒤편에서 낮게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버지, 설도현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중진 자리에 앉은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딱딱했지만, 눈빛만은 조금 다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른 장로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흔들림이었지만, 나는 알아챘다. 아버지는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이지만,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다. 적어도 나한테는. "아버지." 나는 그를 불렀다. 대답이 없다. 그저 시선을 피하지 않을 뿐이었다. 회의가 이어지는 동안 나머지 안건들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규모, 파견 인원, 보급 물자 같은 단어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다. 머릿속은 온통 방금 들은 말로 가득 차 있었다. 회의가 끝난 뒤 아버지가 나를 따로 불렀다. 대전 옆 작은 별실이었다.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에 촛불 하나만 켜져 있었다. 아버지는 문을 닫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장로회 뜻이 아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내가 막을 수 있었다면 막았을 거다." "근데 왜 하필 저예요." 목소리에 힘을 뺐다. 진짜 궁금했다. 견습 중에 나보다 검을 잘 쓰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다고 지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확인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가 말을 골랐다. 신중하게, 단어 하나하나를 저울질하듯이. "네가 정말 평범한지, 아니면..." 말이 끊겼다. 나는 그 뒤에 붙을 단어를 알고 있었다. 검귀. 문파 어른들 사이에서 은밀히 도는 말이다. 내 앞에서는 아무도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 단어를 쓴다는 걸 안다. 검을 쥐면 다른 사람이 되는 아이. 피를 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아이. 그런 뜻으로. "수라라뇨, 오해예요."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그냥 검이 재밌는 것뿐이라니까요." 몇 번을 말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아버지조차도. 아버지는 웃지 않았다. 대신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낯설었다. 아버지는 문파 중진 자리에 앉을 만큼 담대한 사람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그런 사람의 손이 떨린다는 건. "조심해라."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아버지가 저런 얼굴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별실을 나서는데 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무거웠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보면 뭔가 더 물어야 할 것 같았고, 아버지도 더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검을 손질했다. 손에 익은 동작이다. 헝겊으로 날을 닦아내는 그 반복적인 움직임이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오늘따라 유독 오래 걸렸다. 날에 비친 내 얼굴, 하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낯설게 흔들린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색이다. 임서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그 이름.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아서 그런지, 기억 속에서도 흐릿한 실루엣으로만 남아 있다. 다만 이 머리카락과 눈동자만이 그녀가 존재했다는 증거처럼 남아 있다. 나는 검날을 조금 더 오래 들여다보았다. 붉은 눈동자가 마주 본다. 저 눈을 보고 다들 수라라고 부르는 걸까. 아니면 다른 뭔가를 본 걸까. 창밖으로 설악산 봉우리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는 시간치고는 색이 이상했다. 너무 짙고, 너무 오래 머문다. 평소라면 벌써 자줏빛으로 넘어갔을 시간인데, 지금은 여전히 핏빛에 가까운 붉음이 봉우리 전체를 덮고 있었다. 나는 그 붉음을 오래 바라보았다. 좋은 예감은 아니었다. 검을 다 닦고도 한참을 창가에 서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뭔가가 스산했다. 설악산 방향에서 불어오는 공기가 평소와 다르게 무겁게 느껴진다. 그저 기분 탓이라고 넘기기엔, 오늘 하루 벌어진 일들이 너무 많았다. 지휘를 맡으라는 명령. 아버지의 떨리던 손. 그리고 저 이상한 노을. 나는 검을 검집에 넣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뭐가 됐든, 가봐야 알겠지." 내일이면 설악산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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