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문주님, 제가 수라라뇨

4화

붉은 눈과 마주쳤다. 그뿐이었다. 그런데 숨이 막혔다. 산 전체가 그 눈 하나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바람마저 그 앞에서 멈춘 것 같았다. 나뭇잎이 흔들리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안개가 그 눈동자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모여들었다. 붉은빛이 짙어질수록 산 전체의 색이 바래는 느낌이었다. [등급 산정 불가] 반지가 다시 한번 같은 문구를 토해냈다. 나는 그걸 두 번째로 확인하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등급이 없다는 건 두 가지 뜻이다. 아직 발견된 적 없거나, 발견된 사람이 전부 죽었거나. 전자라면 신종이라는 소리고, 후자라면 이 산에서 살아나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소리다. 어느 쪽이든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답다면 나다운 반응이었다. 전생에 이런 장면을 몇 번이나 봤더라. 화면 속에서는 늘 근사했는데. 주인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각성하고, 배경음악이 고조되고, 다음 화 예고편이 뜨는 그런 장면. 지금은 그냥 속이 뒤틀렸다. 배경음악 대신 들리는 건 아이들의 거친 숨소리였고, 예고편 대신 눈앞에 있는 건 서른 명 중 스물여섯이 이름도 모르는 견습들이었다. "하린 언니." 강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이 아이는 평소엔 밝다 못해 시끄러웠는데, 지금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저거,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거야?" 강서아의 손이 창대를 쥐고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아이가 이렇게까지 굳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평소라면 이런 순간에도 실없는 농담을 던졌을 텐데. 모른다고 답하고 싶었다. 그게 정직한 답이었다. 하지만 지휘관이 그렇게 말하면 대형이 무너진다. 대형이 무너지면 사람이 죽는다. 이미 한 명 죽었는데, 더 죽이고 싶지 않았다. "대형 유지해." 내 목소리가 낯설게 들렸다. 이 작은 몸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원래 내 목소리는 이것보다 낮고 굵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끔 이런 순간에 전생의 기억이 끼어드는 게 우습다. 죽음이 코앞인데도 목소리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조은채가 재빨리 후방 인원을 좌우로 갈랐다. "1조는 좌측 방어, 2조는 후방 낙오자 수습!" 가볍게 던지는 말투와 다르게 눈은 이미 계산을 끝낸 사람의 것이었다. "거리는?" 내가 물었다. "삼십 보. 저 속도면 열 걸음 안에 옵니다." 조은채가 즉답했다. 이 아이는 언제나 그랬다. 무슨 상황에서도 숫자부터 계산했다. 그게 이 아이의 방식이었고, 나는 그 방식을 믿었다. 임도윤이 창을 고쳐 쥐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안 무서운 척 안 할래. 나 진짜 무서워." 뚱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무섭다는 말이 오히려 진심 같았다. "무서우면 뒤로 빠져." 내가 말했다. "싫어. 빠지면 언니 혼자 다 뒤집어써야 하잖아." 임도윤이 이를 악물었다. "나 이래 봬도 삼 개월째 안 죽었어. 이번에도 안 죽어." 그 말이 위로가 될 리 없는데도, 조금은 힘이 됐다. 이상한 일이었다. 개체가 움직였다. 쿠웅. 발 하나를 들었을 뿐인데 지면이 울렸다. 나무 우듬지보다 높은 그 실루엣이 붉은 안개를 밀어내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 걸음 하나하나가 지진처럼 느껴졌다. 발밑의 흙이 진동했고, 그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척추까지 흔들었다. 마물 떼가 다시 달려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속도였다. 마치 저 거대한 개체가 신호탄이라도 쏜 것처럼, 산개해 있던 잡졸들이 일제히 이빨을 드러내며 몰려왔다. 아까까지의 산발적인 공격과는 질이 달랐다. "온다!" 서걱. 한 번. 앞줄의 견습 하나가 마물의 발톱에 어깨를 베였다. 비명이 짧게 터졌다. 두 번. 다른 하나가 뒤로 넘어지며 자기 창에 발이 걸렸다. 세 번. 나는 그 셋째 아이의 이름을 몰랐다. 서른 명 중 스물여섯은 이름을 외우기도 전에 이 산에 들어왔으니까.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할 자격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콰악. 그 아이가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속이 뒤틀렸다.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다. 아니, 익숙해지면 안 되는 감각이다. 전생에서 나는 이런 장면을 소비하는 쪽이었다. 죽음을 화면 너머에서 감상하는 쪽. 리모컨을 누르면 다음 화가 시작되고, 죽은 사람은 다시 웃으면서 등장하는 그런 세계. 지금은 그 죽음이 내 앞에서, 내 명령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리모컨은 없었다. 죽은 사람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물러서지 마! 진형 유지!" 목이 찢어질 것 같았다. 이 몸은 아직 성인의 폐활량도 못 갖췄는데 이렇게 소리를 지르니 목구멍이 화끈거렸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내가 멈추면 이 서른 명은 전부 흩어질 거고, 흩어지면 개체 하나에도 못 미치는 잡졸들에게 각개격파당할 거다. 서걱. 서걱. 검을 휘둘렀다. 두 마리를 베었다. 손목에 반동이 왔다. 검을 쥔 이 손이 원래 내 손이 아니었다는 자각이 이럴 때마다 불쑥 튀어나온다. 가늘고 작은 손가락. 성인 남성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중심. 그런데도 검은 내가 휘두르는 대로 정확히 움직였다. 이 재능만큼은 전생의 내가 가져본 적 없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했다. 오타쿠였던 남자가 죽어서, 검술의 재능을 타고난 여자아이로 다시 태어났다. 그 재능을 유일한 오락으로 삼아 살아왔다. 방구석에서 애니메이션만 보던 인생과, 지금 이 산에서 검을 휘두르는 인생. 어느 쪽이 진짜 내 인생인지 가끔 헷갈렸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오락이라 부르기엔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세 마리째를 베어 넘겼을 때, 등 뒤에서 강서아의 창이 마물 하나를 꿰뚫는 소리가 들렸다. 조은채는 후방에서 낙오자를 끌어당기며 동시에 두 명분의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임도윤은 여전히 겁먹은 얼굴로, 그러나 손은 정확하게 창을 내지르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무섭다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대견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하린!" 조은채의 외침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로 드리웠다. 개체가 팔을 들었다. 그것은 팔이라기보다 안개가 응축된 덩어리에 가까웠다. 형태는 사람의 팔과 비슷했지만, 그 표면은 끊임없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경계가 흐릿했다. 마치 저 안에 무언가 살아있는 것을 억지로 눌러 담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저 팔이 떨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굳이 반지의 경고가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막아야 하나. 그것도 아니면. 콰아앙! 지면이 통째로 뒤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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