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한국 귀환, 제 유일한 패입니다

2화

왕도의 거리는 이른 시간부터 상인들의 외침으로 가득했다. 도윤은 그 사이를 헤치며 걸었다. 목적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발걸음은 자연스레 사람이 많이 모이는 광장 쪽으로 향했다. '누구든 붙잡고 물어봐야 한다.' 그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는 스킬을 숨기고 조용히 살아왔지만, 더 이상 그럴 여유가 없었다. 죽음보다 급한 문제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 누구 하나 도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다들 자기 일에 바빴다. 짐을 나르는 인부들, 흥정을 벌이는 상인들,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도윤은 그 풍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단 한 명이라도,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뇌었지만 확신은 없었다. 광장 한쪽에 자리한 노점상 앞에서 도윤은 발을 멈췄다. 채소를 팔던 중년 여인이 그를 흘긋 쳐다봤다. "뭘 사려는 게요, 안 사려는 게요." 여인의 말투엔 귀찮음이 섞여 있었다. "사려는 게 아닙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도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뭔데." 여인의 눈빛이 벌써 시들해졌다. "이 나라에 신원 없이 온 사람이 도움을 받을 만한 곳이 있습니까." 도윤이 물었다. 여인은 잠시 그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었다. "신원 없이 왔다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요." 그녀의 웃음엔 조롱이 담겨 있었다. 도윤은 순간 말을 고르다가, 결국 결심을 굳혔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습니다. 한국이라는 곳에서요. 그곳과 이곳을 오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순간 여인의 표정이 굳었다. 웃음기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채운 건 놀람이 아니라 경멸이었다. "미친 소리 하는 거요, 지금? 다른 세계? 그런 헛소리로 동냥이나 하려는 게지." 여인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저는 동냥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진짜로─" 도윤이 말을 이으려 했지만 여인은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저리 가시오. 장사 방해하지 말고." 여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도윤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처음으로 진실을 말했는데, 돌아온 것은 조롱뿐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지만, 마음 한구석은 이미 상처를 입은 뒤였다. 비슷한 시도는 그날 오전 몇 번 더 이어졌다. 결과는 매번 같았다. 포목점 앞에서 만난 젊은 사내는 처음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도윤이 다른 세계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표정이 싹 바뀌었다. "뭐야, 정신이 나간 놈이구먼." 사내가 킬킬거리며 옆 사람을 불렀다. "이봐, 여기 재밌는 놈 있다. 딴 세상에서 왔단다." 몰려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도윤의 귓가에 오래 남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빵집 앞에서는 도둑으로 몰렸다. 그가 신원이 없다는 말을 꺼내자, 주인은 다짜고짜 그를 붙잡으려 들었다. "신원이 없다고? 그럼 도망자 아니냐. 여봐라, 여기 수상한 놈 있다!" 주인의 외침에 도윤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한 노인은 지팡이를 들어 그를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 동네에 그런 얼빠진 소리 하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야. 다 사기꾼이지." 노인이 침을 뱉으며 말했다. "저는 사기를 치려는 게 아닙니다. 그저 도움을 청하는 겁니다." 도윤이 항변했지만,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끄러워. 썩 꺼지지 못해." 노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도윤은 결국 뒤로 물러섰다. 어떤 이는 웃으며 무시했고, 어떤 이는 도둑이나 사기꾼으로 몰아 큰소리를 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도윤의 걸음은 무거워졌다. 말을 걸 때마다 심장이 조여왔지만, 돌아오는 건 항상 같은 종류의 냉대였다. '몇 번을 더 시도해야 한 사람이라도 믿어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도윤은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도윤은 결국 광장 구석 벤치에 앉아 숨을 골랐다.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관에서 짐이 밖으로 내던져질 시간이었다. 벤치에 앉은 도윤의 눈에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다들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신원도 없고, 증명할 것도 없는. '내가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저들에겐 그저 헛소리로 들릴 뿐이다.' 도윤은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도윤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살아계실 적, 아버지는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진실을 말한다고 세상이 다 믿어주는 건 아니다. 증명해야 믿어준다.' 그때는 그 말이 잔소리로만 들렸는데, 지금은 그 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사업이 어려울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거래처가 말을 믿어주지 않을 때, 은행이 대출을 거절할 때, 아버지는 언성을 높이는 대신 서류를 챙겼다. '말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숫자를 보여줘야, 증거를 내밀어야 그제야 사람들이 움직인다.' 어릴 적엔 그 모습이 초라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도윤은 그 말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했다.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로만 설득하려던 방식이 잘못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증명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증명을 받아줄 만한 곳은, 저잣거리 노점이 아니라 이 나라의 공식 기관일 것이었다. '관청으로 가야 한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위험한 선택이었다. 스킬을 밝히는 순간 어떤 대가가 따를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 자리에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판이었다. 관청이라면 적어도 기록을 남기고 판단을 내릴 권한이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저잣거리 사람들과는 다를 것이라 믿고 싶었다. 정오의 종이 울렸다. 댕- 댕- 도윤은 그 소리를 들으며 왕도 중심부, 관청이 있는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짐은 이미 여관 밖에 내던져졌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이 스킬 하나를 걸고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 관청으로 가는 길은 저잣거리보다 넓고 정돈되어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확연히 달랐다. 도윤은 그 낯선 위엄에 잠시 압도되었지만,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관청의 정문은 높고 위압적이었다. 창을 든 문지기 둘이 좌우로 서 있었다. 도윤은 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멈춰라. 무슨 용무냐." 문지기 한 명이 창을 들어 그를 가로막았다. 말투는 하대였고, 표정엔 이미 하급자를 대하는 태가 배어 있었다. "관청 관리를 만나고 싶습니다. 특별한 능력에 관해 알릴 일이 있습니다." 도윤이 정중하게 말했다. 문지기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남루한 행색, 신분을 증명할 아무것도 없는 이방인이었다. "특별한 능력이라. 그런 놈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온다." 문지기가 비웃음을 흘렸다. "거짓이 아닙니다. 시간을 조금만 내주시면─" 도윤이 말을 이었다. "시끄럽다. 여기가 동냥하는 곳인 줄 아느냐." 다른 문지기가 창끝을 그의 가슴께로 겨눴다. "저는 구걸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이 나라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왔습니다." 도윤이 다시 말했다. "도움이 될 정보? 그럼 그게 뭐냐, 어디 말해봐라." 첫 번째 문지기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하지만 그 말투에는 답을 들을 생각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관리를 뵙고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말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윤이 답했다. "보여줄 게 있으면 지금 보여봐라. 여기서. 우리도 눈이 있다." 두 번째 문지기가 창을 슬쩍 흔들며 조롱했다. 도윤은 순간 말을 삼켰다. 스킬을 이 자리에서, 이 문지기들 앞에서 함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어떤 결과가 따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섣부르게 보였다가 오히려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런 판단이 스쳤다. "이건 관리께 직접 보여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무 데서나 함부로 드러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도윤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럼 못 보여준다는 거 아니냐. 역시 사기꾼이구먼." 첫 번째 문지기가 코웃음을 쳤다. 도윤은 그 창끝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다.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오전 내내 겪은 조롱과 냉대가 머릿속을 스쳤다. 여인의 등, 사내의 웃음, 노인의 지팡이. 그 모든 것을 뚫고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물러나지 않겠습니다. 확인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문지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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