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다섯 시, 온천 관리는 원래 이 시간에 끝내야 한다.
김이 자욱한 탕 안에 뭔가 떠 있었다. 사람 형태였다. 나는 뜨거운 물 온도를 확인하던 손을 멈추고 그쪽을 봤다.
"할머니, 또 여기 계시네요."
동네 뒷산에서 넘어져 돌아가신 이 마을 전전전 이장님 사모님이었다. 3년 전 내가 이 온천을 처음 팠을 때부터 아침마다 들어와 계신다. 산 사람보다 물속에 있는 게 더 편하다고 하셨다. 죽은 사람 말이 원래 더 솔직하다. 살아 있을 땐 다 눈치 보고 사니까.
"물이 좋아. 자네 덕에 매일 호강한다." 목소리가 김 사이로 울렸다. 반말이었다. 예의 차릴 이유가 없는 관계다.
"손님 오시기 전에 나가주셔야 해요. 오늘 첫 팀 예약 있어요."
"쳇." 대답과 함께 형체가 스르륵 흩어졌다. 물결만 살짝 일었다.
다행이다. 요즘 들어오는 분들은 대체로 순한 편이라 나가라고 하면 순순히 나간다. 문제는 순하지 않은 쪽인데, 그건 나중 얘기다. 지난달에 계곡 아래서 들어온 청년 하나는 나가라는 말에 데크 난간을 붙잡고 세 시간을 버텼다. 그날 첫 손님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난간을 붙잡고 실랑이하는 유령과 협상을 해야 했다. 결국 "여기 있으면 매일 물 온도 알려드릴게요"라는 조건으로 겨우 내보냈다. 죽은 사람도 흥정이 통한다는 걸 그때 배웠다.
나는 탕 가장자리에 쪼그려 앉아 온도계를 다시 담갔다. 42도. 적당하다. 손님용 온도는 항상 이 근처로 맞춘다. 너무 뜨거우면 손님이 화상을 입고, 너무 차가우면 환불 요청이 들어온다. 이 세계에도 환불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조금 웃겼다. 죽은 사람들 세상에는 없는 게, 산 사람들 세상에는 꼭 있다.
나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걸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정확히는, 죽은 사람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한국에서도 그랬다.
우리 집은 삼대째 무당 집안이었다. 할머니가 그랬고 어머니가 그랬다. 나는 여덟 살 때 이미 신내림을 받을 운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부터 집안 어른들은 나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나는 그 운명이 싫었다. 신당에 앉아 향을 피우고 남의 죽은 가족 이야기를 대신 들어주는 삶이, 스무 살의 나에게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도망쳤다. 서울에서 배달 알바를 뛰며 그냥 평범하게 살아보려 했다.
평범한 삶은 오토바이 헬멧 하나, 방수 재킷 하나로 시작됐다. 나쁘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은 배달비가 두 배로 올랐고, 그런 날은 오히려 신이 났다. 3년 전 새벽, 배달 오토바이가 신호를 무시한 트럭에 부딪혔다. 브레이크 소리도 못 들었다. 헬멧 안에서 뭔가 깨지는 소리만 들렸던 것 같다. 그날로 끝이었다.
그런데 안 끝났다.
하얀 공간에서 자신을 창조신 한얼이라고 소개한 존재가 나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했다. "네 핏줄에 흐르는 그 능력, 여기서 좀 써줘야겠다." 목소리는 상냥했다. 상냥한 목소리로 남의 인생을 재활용하겠다는 소리를 하는 존재를 나는 그때 처음 봤다. 나는 싫다고 했다. 한얼은 웃으며 "그럼 그냥 소멸시켜줄까?" 하고 되물었다. 협박이라면 협박이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협박. 나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낯선 마을 어귀에 알거지로 서 있었다.
그게 소담촌이었다.
다행히 나는 여기서도 온천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다. 마을 뒷산 계곡 지하에 뜨거운 물줄기가 흐른다는 걸 능력으로 알아채는 건 일도 아니었다. 죽은 자들이 자기가 죽은 자리를 훤히 아는 것처럼, 나는 땅속에 뭐가 흐르는지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 자리를 파서 온천을 냈고, 한국에서 쓰던 보일러 설계와 배관 지식을 어설프게 흉내 내 데크를 얹었다. 처음엔 배관이 다 새서 마당이 늪이 됐다. 두 번째 시도에서야 겨우 물이 제대로 흘렀다. 매트리스는 촌장님 아들의 아들이 어디선가 구해 온 라텍스 원단으로 손수 짰다. 처음 만든 매트리스는 한쪽이 유독 꺼져서 손님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는 항의가 들어왔다. 그것도 다시 짰다. 3년째 그렇게 민박집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괜찮다. 나는 이 삶에 만족하고 있다.
정확히는, 만족하려고 애쓰고 있다.
탕 청소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왔을 때, 익숙한 지팡이 소리가 들렸다.
딸깍. 딸깍딸깍.
촌장님 김덕수였다. 나이가 백 살을 훌쩍 넘었다는데 걸음은 나보다 빨랐다. 흰 수염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이십 대 사기꾼 같았다. 아침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내 집에 들르는 게 촌장님의 일과였다. 정확히는, 내 집에 들러서 뭔가를 부탁하는 게 일과였다.
"도윤이! 좋은 아침이여!"
"안녕하세요, 촌장님. 이 시간에 벌써 마을을 다 도셨어요?"
"내가 몇 살인데 아침잠을 자겠나. 근데 자네, 좋은 소식이 있어."
좋은 소식이라는 말이 촌장님 입에서 나올 때는 대체로 나한테 안 좋은 소식이었다. 지난번 좋은 소식은 마을 도로 확장 공사비를 내 온천 매출로 떠안으라는 거였다. 그 전 좋은 소식은 마을 축제에 쓸 천막을 내 데크에서 빌려 가겠다는 거였고, 그 천막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뭔데요."
나는 벌써부터 방어적인 자세로 수건을 목에 걸었다.
"신전에서 우리 마을로 성녀를 보낸다는구먼. 다온국 성녀 말이여. 국왕 다음 서열이라는 그 성녀."
나는 손에 든 수건을 꽉 쥐었다.
"...그게 왜 좋은 소식인데요."
"자네 집에서 재워야지! 마을에서 손님 받을 수 있는 시설이 자네 집밖에 없잖어."
"촌장님."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성녀요. 국왕 다음. 그런 분을 왜 제 민박집에다가..."
"자네 집이 좋으니까! 이 마을에서 제일 좋은 게 자네 온천 아니여!"
촌장님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나는 반대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국왕 다음가는 위상의 인물을 개인 민박에 들이는 게 얼마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인지 정도는 나도 안다. 서비스에 하나라도 흠이 생기면 그게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는 것도.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존재할 테니까. 배관이 새는 순간 국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손끝이 저릿했다.
"싫습니다."
촌장님은 순간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허리끈에 손을 가져갔다.
"싫으면 내가 마을 잔치에서 옷 벗고 춤춘 거, 자네도 알지?"
안다. 온 마을 사람이 다 안다. 촌장님이 재작년 추수제 때 나체로 마을 광장을 세 바퀴 돌았다는 전설적인 사건이. 그날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촌장님은 노래까지 부르며 돌았다고 한다. 마을 아이들은 아직도 그 노래 후렴구를 흥얼거린다. 그날 이후로 촌장님은 뭐든 뜻대로 안 되면 다시 그 짓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게 특기가 됐다.
"지금 여기서 다시 하시려는 건 아니죠."
"자네가 싫다고 하면 진지하게 고민해볼 거여."
지팡이를 짚은 손이 슬쩍 허리끈으로 다시 향했다. 손가락이 벌써 매듭을 만지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냥 얘기나 좀 더 해봐요."
망했다. 협상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협상이 이렇게 끝났다. 이 마을에서 삼 년을 살면서 배운 게 있다면, 촌장님과의 협상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저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만 가능하다.
촌장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지팡이를 다시 짚었다.
"모레 도착한다는구먼. 호위 기사도 하나 딸려 온다는데, 아주 깐깐하다고 들었어."
"모레요? 벌써요?"
목소리가 저절로 높아졌다. 방 청소는 둘째치고, 침구 상태부터 확인해야 했다. 지난주에 라텍스가 한쪽 꺼졌다고 손님이 항의한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방을 성녀에게 내줄 순 없었다.
"신전 일이 원래 다 이래. 통보만 하고 바로 오는 거지. 준비할 시간을 주면 그게 신전이 아니지."
"그럼 방은 몇 개나 필요한가요? 성녀 혼자 오세요, 아니면 시종도 같이?"
"기사 하나, 시종 하나. 그리고 성녀. 도합 세 명이여."
세 명. 내 민박집에 손님용 방은 총 세 개다. 숫자는 맞았다. 문제는 방 상태였다.
"기사는 깐깐하다고 들었다는데, 정확히 뭐가 깐깐한 거예요?"
"글쎄, 소문으로는... 뭐든 규칙대로 안 하면 화를 낸다더구먼. 신전 규율이 엄격한 곳에서 왔다던가."
규칙대로.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미 머릿속으로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온도계 눈금, 침구 청결도, 식사 시간, 목욕 순서. 세 대 만에 규율에 안 맞는다고 항의가 들어오는 그림이 벌써 그려졌다.
촌장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 쪽으로 사라졌다. 그 흥얼거림이 어제 마을 잔치에서 부르던 그 노래인 것 같아서 나는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나는 마당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서 온천 굴뚝에서 올라오는 김을 바라봤다. 김은 항상 같은 모양으로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나만 다른 걸 걱정하고 있었다.
국왕 다음가는 성녀. 깐깐한 호위 기사. 그리고 나. 죽은 사람은 보이지만 산 사람 다루는 건 여전히 서툰 나.
이건 좋은 소식이 아니라 재난 예고다. 그렇게 확신했다.
하지만 확신했다고 해서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수건을 다시 목에 두르고, 방 세 개짜리 민박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셋 중 어느 방을 성녀에게 내줄지, 어느 방이 그나마 덜 문제가 될지 따져봐야 했다.
문제는, 그 세 방 중 하나에는 아직도 매일 아침 물속에 들어와 계시는 손님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산 손님이 오기 전에, 죽은 손님부터 어떻게든 정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