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다음 날 아침, 강태희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가마솥에서 국물이 끓고 있었다. 멸치와 다시마를 우려낸 육수였다. 나는 국수를 삶을 물을 새로 받으면서 강태희가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걸 지켜봤다. 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안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강태희는 늘 이렇게 격식을 갖췄다. 신전 소속 기사였으니 당연했지만, 이 작은 온천 마을에서 그런 격식은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나는 국수 삶는 아저씨한테 무슨 격식을 갖추나 생각하며 국자를 저었다.
"성녀님이 오늘 축복 의식을 미루셨습니다."
나는 국수를 삶던 손을 멈췄다.
"미루셨다고요? 왜요?"
"몸이 안 좋다고 하셨는데, 제가 보기엔 그냥... 더 자고 싶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강태희의 목소리에 곤란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나는 매트리스가 그렇게까지 좋았나 잠깐 생각했다. 사실 내가 짜맞춘 라텍스 매트리스는 한국 기준으로도 나쁘지 않은 물건이었다. 원단이 무슨 나무 수액에서 나온 특수 라텍스라는데, 촌장님 손자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그 재료가 신전 침구보다 훨씬 좋을 수도 있었다. 신전 침구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강태희 표정을 보면 대략 짚이는 게 있었다.
"돌바닥에 가까운 뭔가였나요?"
"...비슷합니다."
역시.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이라는 곳이 다 그런 식이다. 편안함을 죄악처럼 여기는 곳들이 있다. 거기서 3년을 살았다면 라텍스 매트리스는 아마 천국의 침대처럼 느껴질 것이다.
"괜찮으시면 오늘은 좀 쉬시는 게 어때요. 사흘 일정이니까요."
"그게 문제입니다." 강태희가 목소리를 낮췄다. "성녀님이 오늘 아침, 순례 일정을 연장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국자를 놓쳤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가마솥 옆 돌바닥에 울렸다. 국물이 튀었지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연장이요?"
"일주일로."
일주일. 사흘에서 일주일. 나는 순간 머릿속으로 재고를 계산했다. 국수 재료, 침구 여분, 온천 연료용 장작. 다 부족하지 않았지만 이건 재고 문제가 아니었다.
성녀라는 존재가 순례 일정을 임의로 연장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잘 몰랐다. 하지만 강태희의 얼굴을 보면 그게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신전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규율에 엄격한지는 강태희의 존댓말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조직에서 성녀가 마음대로 일정을 바꾼다는 건, 아마 회사에서 대표이사가 갑자기 잠수 타는 것과 비슷한 무게를 가진 사건일 것이다.
"강태희 님. 신전 쪽엔 뭐라고 보고하실 거예요?"
"...아직 모르겠습니다."
강태희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어깨가 평소보다 처져 있었다. 나는 떨어진 국자를 주우며 생각했다. 이거 뭔가 일이 커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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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이설아가 직접 마당에 나와 나를 찾았다. 표정은 여전히 무감했지만, 손에 뭔가를 쥐고 있었다. 살펴보니 어제 저녁에 먹었던 국수 그릇이었다. 빈 그릇이었다.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는지, 그릇 안쪽이 반들반들했다.
"이거,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만드는 법이요? 조리법이라면 알려드릴 수 있는데..."
나는 잠시 멈칫했다. 성녀에게 국수 조리법을 알려준다는 게 뭔가 이상한 그림 같았지만, 딱히 안 될 이유도 없었다. 재료는 간단했다. 밀가루, 멸치, 다시마, 대파. 특별한 건 없었다. 다만 물의 온도와 삶는 시간이 관건이었는데, 그건 말로 설명하기보단 직접 보여줘야 감이 잡히는 부분이었다.
"매일 먹고 싶습니다."
간단명료한 문장이었다. 강태희가 옆에서 눈을 질끔 감았다.
"성녀님, 이곳은 마을 순례지 중 하나입니다. 신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설아가 처음으로 완전한 문장으로, 완전히 단호하게 말했다. 강태희가 얼어붙었다. 나도 얼어붙었다.
바람이 마당을 스치고 지나갔다. 국수 그릇을 쥔 이설아의 손끝이 살짝 하얘졌다. 세게 쥐고 있다는 뜻이었다.
"성녀님, 그건..."
"저는 3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의식을 치렀습니다. 물은 항상 찬물이었습니다. 신전의 규율입니다."
이설아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표정은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찬물로 몸을 씻고, 기도문을 외우고, 아침 의식을 치르고, 오후에 또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합니다. 그렇게 3년입니다."
강태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수 있고, 매운 음식을 먹을 수 있고, 부드러운 침대에서 잘 수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차이인지, 당신들은 압니까."
강태희가 입을 열려다 다시 다물었다.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서 있었다.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은 익숙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이런 종류의 갈망은 처음이었다. 이건 슬픔도 아니고 원한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 참아온 사람이 마침내 뭔가를 발견한 얼굴이었다.
문득 나는 신전이라는 곳이 사람을 갈아 넣어서 돌리는 조직 같다고 생각했다. 성녀라는 이름이 붙으면 뭔가 특별한 대우를 받을 줄 알았는데, 실상은 3년 동안 찬물 세수하며 기도만 한 셈이었다. 이건 회사로 치면 복지가 아예 없는 수준이었다.
"저녁은 국수로 드릴까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이설아가 처음으로 눈에 옅은 빛을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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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나는 온천 데크에 앉아 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 이설아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김이 데크 위로 올라와 밤공기 속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 얼굴이구먼."
할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할아버지, 저 성녀님 말이에요. 뭔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그냥 편의시설이 좋아서 저러는 것 같지 않아요. 뭔가 더... 무거운 게 있는 느낌이에요."
할아버지는 온천 가장자리에 걸터앉으며 팔짱을 꼈다. 죽은 사람 특유의 태연함이었다.
"신전에서 3년 갈려 나온 사람이 온천 좋다고 저러는 걸로 보이나?"
"그건 아니죠."
나는 능력을 살짝 열었다. 산 사람을 대상으로는 잘 안 쓰는 방식이었지만, 죽은 자들을 보는 눈으로 산 사람의 주변에 남은 옅은 기운을 짚어볼 수는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흔적이라는 게 있다. 오래 억눌린 감정, 반복된 슬픔 같은 것들이 마치 옅은 그림자처럼 몸 주변에 남는다. 나는 그걸 처음으로 산 사람에게 시도해봤다.
이설아의 방 쪽을 바라봤다. 거리가 있어 뚜렷하진 않았지만, 뭔가 어두운 기운이 옅게 감돌고 있는 게 보였다. 원한 같은 강한 감정은 아니었다. 죄책감 비슷한, 훨씬 조용하고 오래된 종류의 것이었다.
"이거 봐라." 할아버지가 낮게 중얼거렸다. "자네도 산 사람 것을 볼 수 있게 됐구먼."
"이게... 조건이 있었나 봐요. 죽은 자만 보이는 게 아니라, 강한 감정이 오래 쌓인 사람도 보이는 거네요."
"그런 걸 알아채는 게 자네 능력의 진짜 모습일지도 모르지."
나는 물끄러미 이설아의 방 창문을 바라봤다. 불이 켜져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저 안에서 그녀는 뭘 하고 있을까. 기도를 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냥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을까.
"할아버지는 저게 뭔지 아세요?"
"모르지. 나는 죽은 놈이지 산 놈 마음까지 읽는 재주는 없어."
할아버지가 킬킬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나는 그 어두운 기운을 오래 바라볼 수는 없었다. 뭔가 캐물을 자격도 없었고, 캐묻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확실히 알게 된 건, 이설아가 성녀직을 버리려는 이유가 단순히 온천과 국수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죄책감. 그 단어가 머릿속에 계속 걸렸다. 뭔가에 대한 죄책감을 3년 동안 기도로 덮어두고 있었던 걸까. 그 죄책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온천에 몸을 담그면서 조금씩 그 껍질이 벗겨지고 있는 건 아닐까.
물이 조용히 흔들렸다. 나는 그날 밤 늦게까지 데크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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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강태희가 신전으로 보낼 편지를 쓰고 있는 걸 우연히 목격했다.
나는 마침 손님방 청소 중이었다. 강태희의 방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책상 앞에 앉은 그의 등이 보였다. 펜을 쥔 손이 유난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 쓰세요?"
강태희는 펜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눈빛이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편지지 몇 장이 구겨진 채 버려져 있었다. 몇 번을 다시 썼다는 뜻이었다.
"성녀님의 상태를 보고해야 합니다. 이건 제 임무입니다."
"이설아 님이 아시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알고 있습니다." 강태희가 짧게 답했다. "하지만 성녀직을 저버리려는 것을 방관하는 건 제 임무를 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목소리에 갈등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나는 강태희가 이설아를 걱정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 임무를 걱정하는 건지 구분이 안 갔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강태희 님, 그런데 그게..."
내가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쾅.
문이 벽에 부딪혀 큰 소리를 냈다.
이설아가 서 있었다. 표정은 무감했지만, 눈빛만은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숨을 몰아쉬고 있었는지 어깨가 미세하게 오르내렸다. 방금 뛰어온 게 분명했다.
"그 편지, 보내지 마."
강태희의 손이 얼어붙었다.
편지지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종이 끝이 구겨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청소용 걸레를 든 채 굳어버렸다. 이거 완전히 잘못된 타이밍에 잘못된 곳에 서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이 방을 빠져나갈 방법도 없었다.
이설아의 눈이 편지지를 향했다. 그다음, 강태희를 향했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