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폐기던전의 포식자

3화

낭떠러지 앞에 선 채로 나는 아직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내 팔을 놓아줬다. 느낌표를 붙이자면 이럴 거다. "놔줬다!" 근데 그게 절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대신 다른 손이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았다. 채영이었다. 같은 반에서 3년 내내 붙어 다닌,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착한 얼굴을 가진 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채영아, 이거 뭐야, 나 진짜 떨어지는 거야?" 채영이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나는 처음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교실에서 나를 보고 웃을 때 짓던 미소랑 똑같았는데, 지금 그 미소가 나오면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게 문제였다. 마치 장례식장에서 누가 웃긴 짤을 보내서 웃음 참는 표정이랄까. 아니, 이건 비유가 좀 잘못됐다. 지금 장례식 주인공이 나니까. "괜찮아, 하준아. 여기서 죽는 게 아니라 밑에 던전이 있대. 살 수도 있어." "살 수도 있다는 게 대체 무슨 위로야!" 살 수도 있다는 건 죽을 수도 있다는 거랑 세트 아닌가. 편의점에서 "이거 유통기한 지날 수도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계산대에 올려주는 거랑 뭐가 다른데. [전도서 3:2,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그럼 지금은 그냥 대충 죽을 때인가. 너무 대충 정해지는 거 아닌가, 사람 목숨이. 전도서 쓴 사람도 설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쓴 건 아니겠지만, 타이밍이 참 기가 막히게 절묘해서 짜증이 났다. 성경도 이렇게 눈치 없이 튀어나올 때가 있구나. 채영이 손에 힘이 실렸다. 밀어내는 힘이었다. "채영아, 잠깐, 잠깐만!"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말이 떠올랐다. 너 나한테 급식 남은 거 나눠줬잖아, 체육 시간에 짝 바꿀 때 내가 너 골랐잖아, 지난달에 내 폰 액정 깨졌을 때 네가 테이프 붙여줬잖아. 전부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기억들이었다. "미안. 근데 오만왕이 F등급 데려온 거 알면 나도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 목소리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마치 학원 시간표 조정하는 것처럼 말했다. 뭐지, 이 태도는? 방금까지 걱정해주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안전 계산기를 돌리고 있었다.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띡, 띡, 띡. 나는 그 계산 결과에서 아마 마이너스 값이었겠지. "채영아, 우리 같은 반이었잖아, 짝도 했었잖아!" "그래서 마지막으로 손이라도 잡아준 거야." 와, 그게 무슨 마지막 인사야. 손절도 이렇게 예의 있게 하는구나. 장례식장 조의금 봉투 건네는 것도 아니고, 손이라도 잡아준다는 게 무슨 배려처럼 느껴져야 하는 건데 지금 내 심장은 배려받는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그 말을 끝으로, 채영이가 손을 놓았다. 촤아아아악! 몸이 허공으로 쏟아졌다. "야, 유채영, 이 씨—" 욕이 반쯤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뒤집혔다. 바람이 얼굴을 때렸고 안개가 순식간에 몸을 감쌌다. 욕은 완성되지도 못한 채 바람에 씹혀서 사라졌다. 욕도 제때 못 하고 죽는 인생이라니, 이건 좀 억울했다. [시편 88:6, 주께서 나를 깊고 어두운 곳 음부 같은 데 두셨나이다] 네, 딱 그 상황입니다. 지금 저 진짜로 그 깊고 어두운 곳으로 가는 중입니다. 성경 저자님, 이거 혹시 저 보고 쓰신 거 아니죠? 아니라고 해주세요, 제발. 떨어지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엄마한테 용돈 갚기 전에 죽으면 어떡하지. 수학 숙제 안 냈는데 그게 마지막 숙제로 남으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들이 죽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거기다 하나 더. 내 방 침대 밑에 숨겨놓은 만화책들, 그거 누가 발견하면 어떡하지. 죽는 순간까지도 정신머리가 참 알차게 굴러갔다. 칭찬받을 일인지 걱정할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뇌는 마지막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몸은 계속 회전하면서 떨어졌다. 위아래 구분이 안 됐다. 안개가 짙어질수록 소리도 이상하게 먹먹해졌다. 꼭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귀가 웅웅 울렸다. 안개 속에서 뭔가 번쩍였다. [스킬: 굼벵이의 걸음 발동을 시도합니다.] 어라, 내 몸이 반응하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쓴 게 아니었는데, 위기 상황이라 자동으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름부터가 참 굼벵이답다. 느린 것도 스킬이 되는구나. 학교에서 제일 굼벵이 같다고 놀림받던 내가 진짜로 굼벵이 스킬을 갖고 있었다니, 이건 운명의 장난인지 그냥 어그로인지 헷갈렸다. [대상: 자신, 낙하 시간을 3배로 늘립니다.] 순간 낙하 속도가 느려졌다. 느낌으로는 놀이공원 자유낙하 놀이기구를 3배 슬로우로 타는 것 같았다. 덜 무섭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서운 시간이 더 길어졌을 뿐이었다. "이런 미친 스킬이 다 있냐!" 놀이공원에서 자유낙하 놀이기구 탈 때 3초 만에 끝나는 그 공포를, 여기서는 9초씩 느껴야 한다는 소리 아닌가. 공포를 세 배로 늘려주는 스킬이 세상에 어디 있어. 이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다른 이름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낙하하는 동안 아래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던전 바닥이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돌바닥이 아니라 뭔가 물컹거리는 지형이었다. 마치 거대한 젤리 위에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색깔도 애매했다. 초록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편의점에서 파는 이상한 맛 슬러시 색깔이랄까. 저기 떨어지면 흡수되는 건지 그냥 튕기는 건지 도무지 예측이 안 됐다. 쿠웅! 충격이 있었지만 뼈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지형 자체가 완충 역할을 한 것 같았다. 다행히 살았다. 살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나는 손가락부터 하나씩 움직여봤다. 다 움직였다. 다리도 움직였다. 목도 돌아갔다. 멀쩡했다. 멀쩡하다는 게 이렇게 감격스러운 일인 줄 몰랐다. [스킬: 잡식이 자동으로 활성화됩니다.] 뭐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잡식이라니, 이건 또 무슨 급식체 별명 같은 스킬이야. 설마 밥 많이 먹으면 강해지는 스킬인가. 그럼 나는 이미 만렙 아닌가, 급식 두 그릇씩 먹는데. 주위를 살피니 젤리 같은 지형에서 뭔가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었다.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점액질 몬스터였다. GYUOOOO... 녀석이 나를 향해 몸을 뻗어왔다. 피할 새도 없이 그 점액이 내 팔에 닿았다. "으악!" 그런데 아프지가 않았다. 오히려 뭔가 흡수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 점액을 흡수하고 있는 건지, 그 점액이 나를 흡수하는 건지 헷갈렸다. 이거 완전 배달앱에서 리뷰 이벤트로 받은 젤리 먹을 때 느낌이랑 비슷했다. 입에 넣으면 스르륵 녹아 없어지는데, 지금은 내 팔이 그 입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게 차이점이었다. [잡식 스킬이 대상을 소화합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점액 몬스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말 그대로 사라졌다. 내가 먹어치운 거였다. 뭐지? 분명 F등급 잡스킬이라고 했는데, 방금 눈앞에서 몬스터 하나를 통째로 삼켰다. F등급이 이 정도면 A등급은 몬스터를 씹지도 않고 삼키나. 아니, 잠깐, 이게 F등급이 맞는 스킬인가? 누가 등급 매긴 거 다시 확인해봐야 할 것 같은데. [욥기 20: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뱉어 내리니] 다행히 뱉어낼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이미 완전히 소화된 것 같았다. 욥기 저자님, 이번에도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시네요. 근데 저는 안 뱉을 겁니다, 소화 다 됐거든요. 주변을 둘러보니 이 젤리 지형 전체가 던전의 일부였고, 곳곳에서 비슷한 점액 몬스터들이 스멀스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수십 개는 되어 보였다. 하나둘 셀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편의점 냉장고에 진열된 젤리 상품들이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근데 그 젤리들이 전부 나를 째려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은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니면 진짜 뭔가 다른 게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채영이가 나를 던진 이유가 오만왕 때문이라고 했다. 근데 이 던전, F등급이 살아남으라고 던져놓은 곳치고는 뭔가 이상하게 나한테 맞춰진 느낌이었다. 아니, 그냥 우연이겠지. 설마 이것까지 계산된 건 아니겠지. 아니야, 지금 그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방금 그 소화 능력을 계속 써야 한다는 것. 점액 몬스터 하나가 다시 다가왔다. 녀석의 몸에서 미묘하게 빛이 났다. 꼭 편의점 야식 코너에서 유통기한 임박 스티커 붙은 도시락처럼, 얼른 먹어달라는 듯한 색이었다. 나는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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