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젤리 지형에서 점액 몬스터를 몇 마리쯤 더 삼켰다.
핥짝! 핥짝!
먹는 방식이 좀 그렇긴 한데, 뭐 어쩌겠어. 여기선 이게 국룰이다.
먹을수록 몸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배가 부른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위장이 텅텅 빈 것처럼 헐렁한데, 그런데도 온몸에 힘이 차오르는 이 괴리감.
뭔가 능력치가 쌓이는 느낌이었다. 마치 확률형 게임 뽑기에서 드디어 원하는 카드가 나온 그런 느낌.
[잡식 스킬 레벨업.]
[등급 F에서 등급 E로 상승.]
등급이 올라갔다는 알림에 나는 잠깐 신났다가 곧 현실을 자각했다.
F에서 E라니, 이게 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시급 백 원 오른 수준 아닌가.
E등급이든 F등급이든 여기서 살아남는 데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주변엔 여전히 점액 몬스터들이 계속 몰려왔다.
촤악, 촤악.
바닥이 온통 젤리 질감이라 걸을 때마다 신발이 쩍쩍 소리를 냈다. 무슨 여름날 아이스크림 트럭 바닥에서 슬리퍼 신고 걷는 기분이었다.
그런 하찮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나도 참 대단하다.
젤리 지형 저편에서 더 큰 그림자가 움직였다.
덩치가 집채만 한 몬스터였다.
GYAAAAAAAA...
소리만 들어도 오금이 저렸다.
등을 싸쥐고 뒷걸음질쳤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주변을 한 바퀴 둘러봤다. 왼쪽은 젤리 지형 특유의 미끄러운 경사, 오른쪽은 방금 내가 삼키느라 시간을 다 쓴 점액 몬스터 떼의 잔당들. 뒤로는 벽. 앞에는 저 괴물.
사면초가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건가 싶었다.
선택지가 몇 개 없었다.
죽거나, 먹거나.
둘 중 하나였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흔히 "선택의 기로"라고 부르던데, 사실 기로도 아니다. 그냥 외길이지, 죽음이라는 벽 앞에서 발버둥 치는 척만 하는 외길.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못 낚습니다, 절대 못 낚습니다.
오히려 저게 저를 낚으러 오는 것 같은데요.
성경도 참, 이 타이밍에 정곡을 찌르시네. 하나님도 순간 타격감 하나는 알아주신다.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스킬을 동시에 발동해봤다.
잡식과 굼벵이의 걸음, 이 두 개를 한꺼번에 쓰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도박이었다.
어차피 굼벵이의 걸음 하나만 써봐도 저 덩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잡식만 써도 일단 손이 닿아야 하는데 저건 손 닿기도 전에 나를 짓밟을 기세였다.
그러니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두 개를 섞어봤다.
[스킬 조합을 시도합니다.]
어라, 이런 게 되는 줄은 몰랐다.
게임에서 흔히 보던 조합 시스템이 이런 식으로 여기서도 통하는구나.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밸런스 패치 좀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다.
[경고: 등급 F 스킬 두 개의 무리한 조합입니다. 반동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동이야 뭐 어쩌겠어, 지금 안 하면 죽는데.
반동 걱정할 여유가 있으면 그 시간에 도망이라도 쳐야 하는데, 도망칠 곳이 없으니 그냥 질러보는 거다.
촤르르르륵!
내 손끝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게 뿜어져 나왔다.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멀스멀 바닥을 타고 흘러갔다.
그 안개가 거대 몬스터의 발밑에 닿는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몬스터의 다리 한쪽이 순식간에 늙어갔다.
비늘이 부스러지고 살이 말라붙었다.
마치 수백 년의 세월이 그 다리에만 압축돼서 흘러간 것 같았다.
이거 완전 무슨 노화 크림 광고 반대편 버전이네. "당신의 피부, 하루 만에 백 년치 노화."
"헐, 이게 뭐야."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멈추고 손끝을 바라봤다. 검은 안개는 여전히 내 손끝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굼벵이의 걸음과 잡식이 결합해 새로운 결과물을 생성합니다.]
몬스터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쿠웅!
젤리 지형이 크게 흔들렸다. 발밑이 마치 트램펄린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출렁였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손을 뻗어 그 몬스터의 몸에 닿았다.
망설일 여유 따위 없었다. 이런 건 타이밍이 생명이다. 배달앱 할인 쿠폰도 이렇게 타이밍 놓치면 끝인데, 목숨이 걸린 일에서야 더 말할 필요가 있나.
[잡식이 활성화됩니다.]
거대한 몬스터가 서서히 형체를 잃으며 내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정보가 쏟아졌다.
마치 그 몬스터가 살아온 시간, 먹어치운 것들, 몸속 구조까지 전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정보량이 너무 많아서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마치 유튜브 알고리즘이 갑자기 내 인생 취향을 다 파악해버린 것 같은, 그런 소름 끼치는 정확도였다.
이 몬스터가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어디서 태어났는지, 심지어 짝을 찾아 헤맸던 기억까지도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잠깐 눈앞이 아득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경험치를 대량 획득했습니다.]
[잡식 스킬이 진화합니다.]
등급이라는 개념이 무의미해지는 느낌이었다.
F등급이니 E등급이니 하던 게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였다. 이건 뭐 편의점 아르바이트 시급 얘기하다가 갑자기 로또 1등 맞은 기분이다.
그 순간, 흡수하던 몬스터의 잔여 에너지가 갑자기 응축되며 눈앞에 검은 구체가 하나 만들어졌다.
지름이 대략 배구공만 한 크기였다.
표면은 물결처럼 일렁였고, 그 안에 별처럼 반짝이는 점들이 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을 조그맣게 압축해서 손에 쥐어준 것 같았다. 감성적으로 말하면 그렇고, 현실적으로 말하면 그냥 시커먼 공이었다.
[새로운 존재가 생성됩니다.]
[명명하시겠습니까?]
뭐지, 이거 완전 몬스터 육성 게임 같은데.
이럴 줄 알았으면 이름 좀 미리 생각해뒀어야 했나. 아니, 애초에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나.
나는 얼떨결에 물었다.
"이름을... 지어야 되는 거야?"
구체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SHHHHHHH...
SHRRRRRRR...
소리가 이상했다.
말은 아니었지만 뭔가 나한테 반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무섭기보다는 궁금했다.
마치 처음 입양한 강아지가 낑낑거리면서 냄새 맡으러 다가오는 그런 느낌.
구체 표면을 살짝 만졌다.
온도가 없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냥 존재만 하는 느낌이었다.
손이 닿는 순간, 뭔가 나와 연결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욥기 41:9, 그것을 잡을 소망은 헛것이라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낙담하지 않겠느냐]
낙담은 안 하는데, 좀 뭉클하긴 하다.
농담이다.
아니, 사실 반은 진짜다. 이런 곳에서 뭔가가 나를 따르겠다고 다가오는 게, 생각해보면 되게 오랜만의 감정이었다.
"심연."
딱 그 단어가 입에서 나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맞는 것 같았다.
다른 이름도 몇 개 스쳐 지나가긴 했다. 뭐 '동글이'라든지 '먹깨비'라든지. 근데 다 아니었다. 이 녀석에게는 좀 더 무게감 있는 이름이 필요했다.
[명명이 완료되었습니다. 심연이 당신의 종복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심연이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몸을 부풀렸다가 다시 원래 크기로 줄었다.
마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드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SHHHHHHH...
"너, 말은 못 하는구나."
SHRRRRR...
대답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뭔가 나를 따르기로 한 건 확실해 보였다.
말 못 하는 종복이라니, 이거 뭐 반려동물 키우는 거랑 뭐가 다른가 싶기도 했다. 사료값 안 나가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주변을 둘러보니 젤리 지형에 남아 있던 다른 점액 몬스터들이 심연을 보자마자 도망치듯 흩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나를 향해 꾸물꾸물 몰려오던 놈들이었는데, 지금은 심연 눈치만 보면서 슬금슬금 젤리 벽 뒤로 숨어들었다.
뭔가 위계 관계가 생긴 것 같았다.
나는 갑자기 이 던전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된 기분이었다.
방금까지 죽을 위기에 처했던 사람이 몇 초 만에 먹이사슬 정점에 올라선 기분이라니, 이거 인생 참 알 수가 없다.
착각이겠지, 아직은.
하지만 그 순간의 착각이 그렇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이 젤리 지형의 왕이었다. 물론 다음 순간 뭐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저 멀리, 젤리 지형이 끝나는 지점에 동굴 입구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 뭔가 썩은 냄새가 흘러나왔다.
콧속을 찌르는 그 냄새는 뭐랄까, 여름날 방치한 음식물 쓰레기통과 오래된 지하실 냄새를 섞어놓은 것 같았다. 향기롭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심연이 그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마치 그쪽으로 가자고 이끄는 것 같았다.
SHHHHHHH, 하고 낮게 진동하는 소리를 내면서 계속 동굴 쪽을 가리켰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여기서 그냥 안전하게 버틸까, 아니면 저 안으로 들어가볼까.
사실 안전하게 버틴다는 것도 웃긴 말이다. 방금 집채만 한 몬스터랑 싸우고 살아남은 곳인데 여기가 안전지대일 리가.
[전도서 7:8,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일단 끝을 봐야 뭐라도 판단이 될 것 같았다.
성경 말씀이 이럴 때는 또 그럴싸하게 들리는 게, 나도 참 신앙심 얄짤없이 편의주의적이다.
결국 나는 동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심연이 내 옆에서 둥실둥실 따라왔다.
동굴 입구에 가까워질수록 그 썩은 냄새는 더 짙어졌고, 안쪽에서는 뭔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 바스락.
뭔가 살아있는 게 저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