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은빛 마력이 공터를 휘감았다. 나무 사이로 스며든 안개가 그 빛에 반응하듯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발밑의 흙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력이 응집될 때 나는 특유의 웅웅거림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이 정도 밀도의 마력을 눈앞에서 본 게 얼마 만인지 셈해보려다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물러서!"
가운데 남자가 소리쳤다. 세 사람 모두 무기를 뽑아 들었다. 검, 창, 그리고 활을 등에 멘 자까지. 근위대 복장이 안개 속에서도 선명했다. 정작 늑대는 나를 등지고 그들을 향해 낮게 이빨을 드러냈다. 방금까지 정신을 잃은 채 떨고 있던 새끼가, 지금은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털이 곧추서고 눈동자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그 눈을 마주 보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짐승의 눈이 아니었다.
[…봉인 반응이 시작됐다.]
진리의 목소리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봉인이라니, 무슨 봉인?"
[저 늑대는 그냥 짐승이 아니다. 마력을 억누르는 봉인이 걸려 있었는데, 방금 화살에 맞은 충격으로 그게 풀리기 시작한 게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말하면 사과를 두 개는 줘야 할 정보였느니라.]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게 대단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지만, 웃을 여유는 없었다.
"사과가 아니라 목숨이 걸린 것 같은데."
[…그럼 세 개.]
"진짜 지금 그게 중요해?"
말싸움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은빛 빛이 늑대의 몸에서 조금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상처 난 틈으로 물이 스미듯,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밖으로 번져 나왔다.
남자들 중 한 명이 검을 들고 늑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창을 든 자도 뒤이어 자세를 잡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던져 그 사이를 막았다.
"멈춰요!"
"비켜! 이건 처리 대상이오!"
"처리하면 그 여파가 어떻게 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예요?"
검을 든 남자의 눈에 짜증이 번뜩였다.
"여파고 뭐고, 저건 마력 폭주 직전의 봉인체요! 그냥 놔두면 이 일대가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걸 막으려는 거잖아요!"
"당신이 뭘 안다고!"
솔직히 나도 방금까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마력 봉인이 강제로 풀리면 그 반동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이 산 전체가 마력 폭발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근위대는 그저 처리 지시를 받았다는 이유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당신들이 저걸 베는 순간, 봉인은 그대로 터져요. 지금까지 억눌려 있던 마력이 한꺼번에 풀린다는 거예요. 그거 감당할 자신 있어요?"
세 사람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확신은 없어도 불안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어쩌자는 거요."
"제가 시간을 벌어볼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조화의 힘. 균형을 잡는 힘. 봉인이 강제로 풀려나가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다면, 여파를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마 지금 그걸 쓰려는 게냐.]
"다른 방법 있어?"
[없다. 그런데 그거 몸이 못 버틴다고 몇 번을 말해야…]
"방법 없으면 조용히 좀 해."
손바닥을 늑대의 등에 가져다 댔다. 순간 은빛 마력이 내 손을 타고 역류하듯 밀려들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압도적인 밀도의 무언가가 몸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숨이 턱 막혔다. 코끝에서 피 냄새가 훅 올라왔다. 코피였다.
손끝부터 시작된 저림이 팔목을 지나 어깨까지 번졌다. 몸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팽창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가면 터지는 게 늑대인지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조화의 힘으로 이 정도 마력을 다뤄본 적이 없었다. 삼십 년 전에도, 지금도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몸이 그 마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멈춰라! 그 마력을 그대로 받으면 몸이 못 견딘다!]
"지금 안 받으면 이 산이 못 견딜 것 같은데."
[…이런 미친.]
진리마저 욕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마력을 계속 조율했다. 늑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파동을 조화의 힘으로 하나씩 정렬했다. 격류를 막을 수는 없어도, 방향을 바꿀 수는 있었다.
파동 하나를 겨우 붙잡아 눕히면 또 다른 파동이 튀어 올랐다. 마치 사방에서 터지는 폭죽의 심지를 하나씩 손으로 눌러 끄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델 것처럼 뜨거웠다가, 다음 순간 얼음처럼 시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혼잣말인지 진리에게 하는 말인지도 구분이 안 됐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그 짧은 순간 동안 늑대의 몸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봉인이 완전히 풀리기 직전의 징조였다.
남자들은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려던 자도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창을 든 자는 아예 창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저게 뭐 하는 짐승이야."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 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근데 저 사람 코피 나는데 괜찮은 거요?"
"몰라, 일단 지켜봐."
둘의 대화가 귀에 스쳤지만 대답할 정신은 없었다. 마력의 격류가 서서히, 아주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은빛 빛이 잦아들고, 새끼 늑대의 눈이 다시 짐승의 것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늑대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나는 무릎을 꿇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손끝이 아직도 시렸다. 코피가 턱까지 흘러내렸다. 옷소매로 대충 닦아냈지만 손이 떨려서 제대로 닦이지도 않았다.
[…살았다.]
"살았다는 말을 그렇게 무덤덤하게 하지 마."
[살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
가운데 남자가 나를 노려보며 다가왔다. 검은 아직 손에 쥔 채였지만, 겨누고 있지는 않았다. 그게 나한테 다행인 건지 아닌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당신, 이름이 뭐요."
"…그냥 지나가던 장인이에요."
"장인이 이런 걸 할 수 있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실 나도 방금 내가 뭘 했는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사람들이 나를 그냥 지나가는 사람으로 보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옆에 있던 창을 든 남자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단장님, 저건 확실히 보통 마도구 장인이 낼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저희가 아는 마력 조율사들 중에도 저런 식으로 봉인 반응을 억누른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더 캐물어야지."
가운데 남자, 아마 저들 중 계급이 가장 높은 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일은 상부에 보고해야겠소. 이름과 소속을 밝히시오."
등줄기가 시렸다. 지금 이름을 밝히면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강도현의 부대가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면, 이름 하나만으로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지금 도망쳐야 한다.]
"알아."
"…죄송하지만, 저는 이만 가봐야 해서요."
"거기 서시오!"
말은 그렇게 나왔지만 발은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늑대를 다시 품에 안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정신이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상태로 뛰어야 했다.
"잡아! 놓치면 곤란하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걸 억지로 눌러 참고 산길을 뛰기 시작했다. 늑대의 무게가 코피로 흐릿해진 시야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팠지만 멈출 겨를이 없었다.
[…큰일 났다.]
"그러니까 진작 말했어야지!"
[말했어도 상황은 똑같았을 거다. 지금 중요한 건 저들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니라.]
"말은 쉽지."
[뛰면서 말도 잘 하는구나.]
"지금 그게 감탄할 상황이야?"
안개가 짙어지며 시야가 더 좁아졌다. 발밑에 뭐가 있는지도 제대로 안 보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걸 겨우 버텼다. 등 뒤에서 여전히 발소리가 따라붙었다. 세 명이 다 쫓아오는 건지, 한 명만 남은 건지 구분할 여유도 없었다.
안개 속을 달리는 내 등 뒤로, 남자들 중 하나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용사님께 보고한다! 마력 오염 지역에서 미확인 마도구 장인을 발견했다고!"
그 한마디가 산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발이 멈췄다. 다시 뛰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잠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는 이제 강도현의 시야 안에 들어갔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