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형 대신 던전에 간 차남

1화

귀족학원의 오후 수업은 언제나 지루했다. 마력학 개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내용은 삼 년 전 내가 혼자 도서관에서 씹어 삼킨 것들의 재방송에 불과했으니, 교수의 입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속으로 답을 미리 읊고 있었다. '2절 마력순환은 심장을 중심으로 도는 게 아니라 단전과 유사한 하단부 응축점에서 시작된다.' 그 정답이 삼십 초 뒤 교수의 입에서 그대로 흘러나오는 걸 들으면서, 나는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 척하며 하품을 씹어 삼켰다. 옆자리에 앉은 동기 하나가 필기를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봤는데, 아마 저 녀석 눈엔 내가 그냥 수업에 관심 없는 둔한 차남으로 보이겠지. 나쁘지 않은 평판이다. 오히려 딱 맞는 평판이라고 해야 할까. 남들이 보기엔 그저 둔한 차남일 뿐이겠지만, 사실 나는 이 세계에 떨어진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진짜 실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드러낼 수 없었다는 게 맞겠다. 교수가 마력순환의 원리를 설명하며 칠판에 응축점의 위치를 그릴 때, 나는 이미 그 그림이 절반쯤 틀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는 저기가 아니라 조금 더 아래, 골반 안쪽에 가까운 지점이다. 하지만 그걸 지적하는 순간 나는 반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학생이 되어버릴 테고, 그건 내가 사 년째 피해온 상황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버지 이태석 남작은 형 이건우만 보고 있었고, 내가 형보다 조금이라도 두각을 보이면 그 시선이 더 삐딱해질 것이 뻔했으니까. 청림 남작가의 적자는 이건우고 나는 그저 여분이었다. 여분이 주인공보다 빛나면 극이 이상해지는 법이라, 나는 사년 넘게 스스로 빛을 죽이는 연습을 했다. 검술 훈련 시간에 일부러 자세를 흐트러뜨리고, 마력 측정 시험에서 적당히 부족한 수치를 만들어내는 것도 이젠 몸에 익어서 별다른 노력조차 필요 없어졌다. 처음엔 어려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진짜 실력을 다 드러내는 쪽이 더 어렵게 느껴질 정도였다. 연기가 본능이 되어버린 셈이니, 이것도 나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지. 어쩌다 이런 세계에, 이런 몸에 들어와 버렸는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지만—전생의 기억이랍시고 남아있는 건 잡다한 지식 몇 조각과 세상이 게임처럼 굴러가는 것 같다는 느낌뿐이었다. 마력 수련 요령도, 검술의 기본 원리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공략처럼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으니, 이건 사기가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문제는 그 공략집이 어느 시점, 어느 상황에서 터지는지 알려주는 친절한 알림창 따위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냥 살아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익숙한 상황이 튀어나오고, 나는 그제야 '아, 이거 그거였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는 식이었다. 오늘도 그런 날의 시작이었다는 걸, 그때는 전혀 몰랐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로 걸어가는 길, 정원의 마른 낙엽을 밟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겨울이 코앞이라 공기는 서늘했고, 회색 하늘 아래 학원 건물의 백색 대리석 기둥들이 유난히 차갑게 빛났다. 나뭇가지 사이로 새 몇 마리가 낮게 날아가는 걸 보면서, 나는 저녁 식사로 뭐가 나올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은 감자수프였던가, 아니면 양고기였던가. 그런 실없는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우던 참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낯익은 실루엣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정하윤이었다. 어머니 한서린의 시녀이자, 원래는 관료 시험까지 통과했으나 사정상 문관이 되지 못한 여자. 평소엔 걸음걸이마저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이 저렇게 뛰어온다는 건, 좋은 소식일 리 없다는 뜻이었다. 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달려오는 그녀의 얼굴은 평소의 무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이미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느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게 흘렀고, 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기다렸다. "도련님."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멈춰 섰다. 숨소리가 거칠어서 말을 잇기까지 몇 초쯤 시간이 걸렸다. "영지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나는 순간 웃음기를 지웠다. '급보'라는 단어가 이 세계에서 갖는 무게를 모를 리 없었으니까. 이 세계에서 급보란 대개 좋은 소식이 아니라 재난이나 죽음, 혹은 그 둘 사이의 무언가를 뜻했다. "말해봐요." 내가 짧게 답하자, 정하윤은 숨을 고르지도 않은 채 곧바로 사실을 늘어놓았다. "이태석 남작님께서 흑철 던전 사냥 중 크게 부상을 입으셨습니다. 현재 의식이 불안정한 상태로, 영지 저택에서 요양 중이십니다." 그 말에 나는 잠깐 멍청하게 서 있었는데, 신체 반응이 먼저였다. 심장이 두어 번 크게 뛰더니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고, 나는 그 감각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물었다. "언제 일입니까." "닷새 전입니다. 전령이 최대한 서둘러 왔으나 거리가 있어 늦어졌습니다." 닷새. 닷새 동안 아버지는 의식 없이 누워 있었고 나는 그 사실도 모른 채 마력학 개론 수업에서 하품을 씹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속을 뒤틀었다. "형님은요." 정하윤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마치 말을 고르는 듯한 침묵을 두고서야 다시 열었다. "이건우 도련님은... 현재 행방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지만, 어딘가 곤란함이 배어 있었다. 마치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스스로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사람처럼. 그 순간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아니, 정확히는 웃음이 나오는 게 아니라 어이가 없어서 몸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뿐이었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던전에 들어간 이유가 세금 납부 기한 때문이었고, 그 옆에 있어야 할 적자란 놈이 사라졌다는 건, 상황이 얼마나 개판인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주는 셈이었다. '역시 이 형은 위기의 순간마다 인간이 아니라 도마뱀으로 진화하는군.' 도마뱀은 위험을 감지하면 꼬리를 끊고 도망친다던가. 형은 꼬리 대신 책임을 끊고 도망친 모양이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짐짓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흑철 던전이면 삼급 던전인데, 남작가 사병만으로 들어갔을 리는 없고." "용병단을 고용하셨습니다. 세금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던전 심층부의 흑철 원석을 노리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형님은 그 원정에 동행했다가 사라졌다는 거고요." "그렇습니다." 짧고 건조한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의 무게는 결코 짧지 않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상황을 정리했다. 부상당한 가주, 실종된 적자, 그리고 채워지지 않은 세금. 이 셋이 한꺼번에 놓인 저울 위에 지금 내가 올라서야 한다는 뜻이었다. "짐 챙길게요. 지금 바로 출발합시다." 내가 말하자 정하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표정 없는 얼굴 아래로 안도인지 걱정인지 모를 감정이 스치는 걸 나는 못 본 척했다. "마차는 이미 준비 중입니다. 후원 쪽에서 대기할 예정입니다." "빠르네요." "도련님이 승낙하실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여자는 늘 이랬다. 내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그 결정을 예상하고 움직이는, 그런 종류의 유능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 무게를 애써 가벼운 걸음으로 바꿔놓으려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익숙한 책 냄새와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옷장에서 여벌 옷 몇 벌을 꺼내고, 책상 위에 쌓인 마력학 서적 중 필요한 것만 골라 담으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짐을 싸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속으로 '침착하자, 침착하자' 하고 되뇌었다. 검 한 자루를 챙기려다 멈추고, 대신 그동안 숨겨왔던 마력 서적 몇 권을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이번 여정에서는 어쩌면 더 이상 실력을 숨기고 있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쳤기 때문이었다.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전언이 도착한 건 그로부터 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고, 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학원 건물을 한 번 돌아보았다. 백색 기둥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빛이 비스듬히 비쳐 들었고, 그 빛 속으로 몇몇 학생들이 아무 걱정 없이 웃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저 평온함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그리고 그 부러움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동시에 깨달으며 나는 마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학원의 첨탑을 바라보며 이 여정이 결코 짧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몸을 떨었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굴러가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영지에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 무엇일지, 나는 아직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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