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형 대신 던전에 간 차남

4화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공간에 서 있었다. 발밑은 새하얀 안개로 뒤덮여 있었고, 위를 올려다봐도 하늘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으며, 사방은 그저 균일한 백색의 빛으로 채워져 있었다. 소리도 없었다. 바람도 없었다. 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 정적이 오히려 기이하게 느껴졌다. '죽은 건가.' 나는 담담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손을 들어 내 몸을 확인했는데, 상처도 없고 통증도 없었다. 어깨를 물어뜯긴 자리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 이상한 평온함이 오히려 불안하게 느껴졌다. 전생에서도 이런 식으로 갑자기 시작되는 튜토리얼 화면을 몇 번이나 봤던가. 이번엔 또 뭘 시켜먹으려고 이런 배경을 깔아두는 건지. 그때 눈앞에 흐릿한 문자들이 떠올랐다. 마치 허공에 그려진 듯한 그 문자는, 이 세계의 언어가 아니라 전생에서 익숙했던 시스템 메시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잠재된 마력 회로가 최초로 완전 개방되었습니다.] [축적된 마력이 육체의 한계를 초과하여 재구성됩니다.] [봉인 상태였던 마력 순환 구조가 강제로 해제됩니다.] [경고: 육체 재구성 도중 사망할 확률이 존재합니다.] 그 문구들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순간까지도 시스템은 참 성실하게 설명충 노릇을 하는군. 죽을 확률이 있다는 건 굳이 지금 알려줄 필요가 있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차오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건 통증이라기보다는 오래 억눌러온 것이 마침내 풀려나는 감각에 가까웠다. 배 속 어딘가에 눌러놨던 강이 갑자기 댐이 터진 것처럼 흘러넘치는 느낌이랄까.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나는 내 마력을 스스로 억누르며 살았다. 어릴 적부터 독학으로 마력 수련을 했지만, 형보다 두각을 드러내면 아버지의 시선이 더 삐딱해질까 두려워 늘 칠 할 이상을 봉인해두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늘 형만 바라봤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존재감 없이 자라는 게 오히려 안전하다고 믿었다. 재능을 드러내는 순간 경쟁자가 되고, 경쟁자가 되는 순간 아버지의 저 차가운 시선이 나를 향할 테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깎아내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였던가. 그런데 지금, 그 봉인이 강제로 뜯겨나가는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마치 오랫동안 조여놓았던 나사가 한꺼번에 풀리며 기계 전체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시야 속 백색 공간이 점점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그 붉은빛 사이로 낯선 문양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는데, 마치 오래된 회로도가 몸 전체에 새겨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팔뚝을 타고 흐르는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그것들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교차하며 신경을 긁어댔다. 나는 그 감각을 애써 견디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 정도로 화려한 이펙트라면 적어도 로딩화면에 자막이라도 좀 달아주지. 어디로 가는지, 뭐가 되는지 알려주는 최소한의 서비스 정신도 없다니, 이 세계의 시스템은 정말이지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숲길 바닥에 누워 있었다. 흙냄새와 젖은 나뭇잎 냄새가 코끝을 찔렀고, 멀리서 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깨의 상처는 여전히 아팠지만, 그 통증조차 견딜 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몸 안쪽에서 낯선 힘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치 몸속에 새로운 심장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을 뜨자 박강의 얼굴이 바로 위에 있었는데, 그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평소 그렇게 무뚝뚝하던 남자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상황이 어지간히 심각했던 모양이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그가 묻자,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마물은요." 박강은 짧게 답했다. "도망쳤습니다. 도련님의 몸에서... 갑자기 빛이 뿜어져 나오자 놀라서 달아났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깐 멍하니 있었다가, 이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빛을 내뿜었다니, 그 정도면 성능 과잉 아닌가. 마물 입장에서는 갑자기 눈앞에서 사람이 폭발한 셈이니 도망칠 만도 하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게 몸을 살폈다. 손끝을 움직여보니 아직 어색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근육을 처음 써보는 것처럼, 힘의 크기와 방향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상황은 생각보다 나빴다. 병사 하나는 크게 부상을 입어 옆구리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다리가 부러진 채 신음하고 있었으며, 박은지는 무사했지만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보니,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충격만 받은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나조차도 방금 내 몸에서 벌어진 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정리했다. 마물은 도망쳤지만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고, 부상자를 데리고 던전까지 가는 건 불가능했다. 다리가 부러진 병사를 업고 산길을 넘는다는 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여기 방치해둘 수도 없었다. "부상자들은 근처 대피소로 옮기고, 저와 박강만 던전으로 갑니다." 내가 말하자, 박강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도련님, 방금 그 힘은..." 그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경외, 의심, 그리고 뭔가 배신감 비슷한 것까지.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 "나중에 설명할게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박강은 잠시 침묵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련님이 그동안 숨겨온 게 이 정도였다면, 저희에게도 말씀해주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말속에 서운함과 불신이 옅게 섞여 있는 걸 나는 느꼈지만, 지금은 그걸 풀어줄 여유가 없었다. 박강 입장에서는 몇 년을 곁에서 모신 도련님이 갑자기 정체불명의 빛을 뿜으며 마물을 쫓아냈으니, 당황스러운 게 당연했다. 언젠가는 제대로 설명해야 할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럴 시간도, 그럴 여유도 없었다. "부상자들, 걸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병사들에게 묻자, 다리가 부러진 병사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목만 대주시면... 어떻게든 기어서라도 가겠습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박은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은지, 이 두 사람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대피소까지만 데려다주면 됩니다." 박은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도련님. 조심하세요." 그 짧은 인사 속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옅게 웃어 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지만, 걷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오히려 몸속에서 요동치는 이 낯선 힘이 걸음마다 이상한 활력을 실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일으켜 숲길 너머 던전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안쪽 어딘가에 아버지가 있었다. 시간은 아흐레도 남지 않았고, 이제는 진짜로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떼어야 했다. 박강이 조용히 내 옆에 서며 창을 고쳐 잡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던전 입구에서 새어나오는 서늘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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