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형 대신 던전에 간 차남

2화

영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밀밭을 바라보며 지도를 다시 떠올렸다. 청림 남작가의 영지는 왕국 변경에 붙은 작은 땅이었고, 그 척박함 때문에 세금 대신 흑철 던전에서 나오는 광물로 국고를 채워야 하는 특수 조약을 맺고 있었다. 매년 정해진 기한까지 흑철 원석을 일정량 헌납하지 못하면 영지는 즉시 왕실 직속으로 몰수당한다는 조항이었으니, 아버지가 몸을 던져서라도 사냥을 강행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마차 바퀴가 돌바닥을 긁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렸는데, 그 초조함을 감추려 애쓰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전생에서는 마감 하루 전에 원고를 몰아 쓰다가 손끝이 떨렸다면, 지금은 목숨과 영지가 걸린 마감을 앞두고 떨고 있으니, 스케일만 커졌을 뿐 본질은 똑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창밖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밀밭이 끝나고 돌담이 이어지더니, 낡은 석조 다리를 지나자 저 멀리 회색 첨탑이 눈에 들어왔다. 청림가의 저택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벽을 타고 자란 담쟁이덩굴이 색이 바랜 벽돌 사이로 얼룩진 자국처럼 번져 있었고, 그 위로 까마귀 몇 마리가 날카롭게 울며 지나갔다. 나는 그 울음소리가 유난히 신경을 긁는다고 느꼈는데, 아마 지금 내 심장이 그만큼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지 저택에 도착했을 때, 대문 앞은 이미 어수선했다. 병사 몇이 창을 든 채 서성이고 있었고, 마당 한복판에는 흙투성이가 된 마차 한 대가 부서진 바퀴를 매단 채 방치되어 있었다. 바퀴 살 하나가 완전히 부러져 나가 있었고, 마차 옆면에는 무언가에 긁힌 듯한 깊은 흠집이 세 줄로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발톱 자국이었다. 흑철 마물의 발톱이 남긴 자국을 보는 순간, 내 허파가 순간적으로 요동쳤다. 저 정도 크기의 발톱을 가진 놈이라면, 아버지가 정말로 목숨을 걸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곧장 저택 안으로 들어갔는데,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하인들의 시선이 나를 좇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 속에는 안도와 불안이 뒤섞여 있었고, 나는 그 무게를 애써 무시하며 어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벽에 걸린 초상화들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 안에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이건우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림 속 이건우는 순진한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나는 그 웃음이 얼마나 얇은 가죽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한서린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원래도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그 위로 피로와 걱정이 겹겹이 쌓여 있어 평소보다 훨씬 야위어 보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려는 듯 두 손을 옷자락 앞에 꼭 맞잡고 있었고, 눈 밑에는 며칠은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의 그늘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도현아."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안도가 섞여 있었지만, 그 안도 아래 훨씬 무거운 것이 있다는 걸 나는 직감했다. "아버지는요." 내가 묻자, 어머니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 짧은 순간에도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는데, 아마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고르고 있었을 것이다. "의식은 있으시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셔. 흑철 마물의 독이 상처를 통해 퍼져서, 해독약이 없으면 열흘 안에... 다리를 못 쓰게 되실 거라고 하더구나." 그 말에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가, 다시 뱉었다. 열흘. 딱 그 정도 시간을 남겨두고 사람 목숨을 저울질하는 이 세계는 참 정직하기도 하지. 속으로 그렇게 되뇌면서도 나는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하필 남작가 세금 마감이 아흐레라던데, 해독약 기한은 열흘이라니. 이 우주가 나를 상대로 무슨 타이머 게임을 돌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절묘한 숫자였다. "해독약은 어디서 구할 수 있어요?" 나는 물었고,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영지 안에는 없어. 왕도의 연금술 조합에서만 조제하는데, 그것도 재료가 흑철 마물의 심장 부위여야 한다고 들었다." 심장.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이 상황이 얼마나 지독하게 맞물려 있는지 깨달았다. 세금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던전에 들어가야 했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던전 깊숙이 있는 마물의 심장을 구해야 했다. 결국 답은 하나로 좁혀졌다. 나는 그 사실을 곱씹으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건우 형은요." 그 질문에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어지는 걸 보며, 나는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었다. "사냥 도중 마물 무리에게 포위됐을 때, 네 아버지가 뒤를 막는 사이 혼자 도망쳤다고 들었다. 살아남은 병사들 말로는... 아버지를 부축조차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더구나."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를 악물었는데,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이 상황이 얼마나 예상 가능한 결과였는지를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이건우는 늘 그런 인간이었다. 자기 몸이 위험해지는 순간, 옆 사람이 누구든 발가락 하나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놈. 십삼 년 전 박은지에게 벌였던 짓거리를 떠올리면, 오늘 아버지를 버린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그때의 박은지가 어떤 얼굴로 울었는지,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이 궁지에 몰렸을 때 본성이 드러난다는 말은, 적어도 이건우에게는 매번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지금 형은 어디 있어요?" 내가 묻자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저택에는 없다. 도망쳐 온 뒤로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어. 내가 문을 두드려도 대답조차 없더구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도망쳐서 방구석에 틀어박힌 놈이라니, 적어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 부끄러움이 아니라 두려움이겠지. 자기가 벌인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어떤 시선을 받게 될지 계산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때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리더니, 박강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른손에 힘이 없어 늘 왼손으로 물건을 쥐는 그의 모습이 눈에 익었지만, 오늘은 그 왼손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에 든 얇은 장부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는 걸 보니, 그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 숫자를 들고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도련님." 박강이 짧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세금 납부 기한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아흐레입니다. 현재 저희가 보유한 흑철 원석은 요구량의 사할에도 못 미칩니다." 나는 그 사무적인 목소리에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숫자만 딱딱 읊는 이 남자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장 믿음직스러웠다. 세상이 무너져도 이 사람은 장부부터 챙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지금은 오히려 고마웠다. "남은 원석을 다 팔면 얼마나 채워지지?" 내가 묻자 박강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답했다. "육할까지 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하면 영지 운영 자금이 완전히 바닥납니다. 병사들 월급도, 겨울 대비 식량도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던전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군." 내가 말하자, 박강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하지만 남작님이 부재하시고 이건우 도련님도 자취를 감추신 상황에서, 사냥을 지휘할 사람이 없습니다." "용병을 고용하는 건 어떤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박강은 고개를 저었다. "흑철 던전은 등급이 낮지 않습니다. 변경까지 와줄 실력 있는 용병단을 고용하려면 최소 열흘의 시간과, 지금 우리에게 남은 자금의 세 배가 필요합니다." 시간도, 돈도 둘 다 없다는 뜻이었다. 이쯤 되니 선택지가 애초에 하나였다는 게 점점 명확해졌다. 그 말에 방 안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어머니의 눈빛에는 걱정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고, 박강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지만 그 안에 무언가 시험하는 듯한 색이 섞여 있었다. 창밖에서 들리던 까마귀 울음소리가 문득 멎었고, 방 안에는 벽난로 장작이 타는 소리만 조용히 남았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결국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결국 이 집안에서 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저 하나라는 소리네요." 능청스럽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금까지 숨겨온 것을, 이제는 드러낼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 세계로 넘어온 뒤 조용히 갈고 닦아온 것들을, 이런 식으로 급하게 꺼내 들게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니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손을 들어 막았다. "걱정 마세요. 저 생각보다 강해요." 그 말에 박강의 눈썹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미세한 움직임 하나가, 이 건조한 남자의 얼굴에서 내가 여태 본 것 중 가장 큰 감정 표현이었다. "도련님." 박강이 낮게 나를 불렀다. 목소리는 여전히 사무적이었지만, 그 안에 처음으로 무언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흑철 던전 2층에는, 남작님을 그렇게 만든 개체보다 더 큰 것이 서식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지난달 파견된 조사대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은, 이 세계에서는 죽었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였다. 어머니의 얼굴이 다시 새하얗게 질렸고, 방 안의 온도가 한 번 더 내려앉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 던전행은, 지금까지의 사냥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가진 도박이 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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