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말단 시녀, 세계를 쓴 작가

2화

지헌 백작가의 시녀 서열은 생각보다 살벌했다. 상급 시녀, 정식 시녀, 견습 시녀, 그리고 그 밑에 나 같은 잡무 담당이 있었는데, 이 계급 구조는 어느 회사 조직도랑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할 지경이었다. '전생에도 부장, 팀장, 사원, 인턴 있었는데 여기도 똑같네.' 심지어 직급마다 앞치마 끈 색깔이 다르다는 것까지 똑같았다. 상급 시녀는 짙은 남색, 정식 시녀는 회색, 견습 시녀는 옅은 갈색, 그리고 나는 그냥 흰색이었는데, 이건 계급이라기보다 '아무거나 시켜도 되는 사람'이라는 표식에 가까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야근 수당은 없어도 야근 자체도 없다는 점이었는데, 그건 이 세계 사람들이 착해서가 아니라 밤에는 마물이 돌아다니니 다들 일찍 자야 한다는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워라밸을 지켜주는 건 결국 사람이 아니라 몬스터였다니, 이것도 나름 아이러니지.' 상급 시녀 헤르타는 지헌 백작가에서 이십 년을 일했다는 자부심을 서두마다 붙이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 저택에서 이십 년을 있었는데 말이야, 요즘 애들은 인사도 제대로 안 해." 그녀는 내가 지나갈 때마다 그 말을 되풀이했는데, 정작 나는 인사를 안 한 적이 없어서 매번 억울했지만 굳이 반박하지는 않았다. '반박하면 일이 늘어난다는 걸 나는 두 인생을 살면서 배웠다.' 대신 나는 고개를 더 깊이 숙이는 전략을 택했고, 그 전략은 신기하게도 언제나 효과가 있었다. 헤르타 언니는 고개를 숙이는 각도로 상대의 충성도를 측정하는 것 같았는데, 그 기준이 얼마나 정교한지 가끔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그날은 저택 전체가 유독 분주했다. 응접실 바닥을 광까지 내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정원사들은 있는 꽃을 다 자르고 없는 꽃을 새로 심느라 정신이 없었으며, 주방에서는 평소보다 세 배는 많은 재료가 들어왔다. 계단 난간까지 새로 기름을 먹였고, 복도 카펫은 아침에 한 번, 오후에 또 한 번 털렸다. 나는 그 소란 속에서 대충 눈치를 챘다. '드디어 오는구나.' 손님이 온다는 정도는 짐작했지만, 그 손님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아니, 몰랐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다. 저택 안에 도는 소문의 절반은 이미 내 귀에까지 들어와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헤르타 언니가 시녀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마지막 점검을 하며 말했다. "오늘 오시는 분은 선현 공작가의 령녀님이시다. 다섯 살이시고,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실 거야. 다들 예의를 갖춰서 모셔라." 그 이름이 정식으로 언급되는 순간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게 느껴졌다. 원래 리아의 전담 시녀로는 정식 시녀 중 한 명인 베네사가 배정될 예정이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응접실 유리창을 닦다가 옆방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그냥 흘려들었을 뿐인데, 베네사가 관리인에게 정중하지만 확고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가 아이라니 부담스럽습니다. 게다가 그 아이, 소문에는—" 거기서 목소리가 낮아져서 뒷말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그 소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조기 마력 각성, 통제되지 않는 힘, 그리고 그 힘 때문에 벌어졌던 사건들. 게임 설정집에 내가 직접 써넣은 내용이었으니까. 관리인의 목소리도 이어졌는데, 달래는 투였다. "그래도 공작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죄송합니다.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베네사의 목소리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유리를 닦던 손을 멈추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겁먹을 만하지. 나라도 저 소문만 듣고 자원하진 않았을 거야.' 관리인은 결국 다른 시녀를 찾아야 했고, 그날 오후 나는 헤르타 언니에게 불려갔다. 불려가는 길에 나는 별생각 없이 걸었다. 잡무 담당이 불려가는 이유는 대체로 뻔했으니까. 접시가 깨졌거나, 물을 엎질렀거나,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거나. "채미리, 너 아이들 잘 다룬다고 주방에서 그러던데."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서 눈을 깜빡였지만, 곧 지난주 요리사 아주머니의 막내를 봐줬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그냥 우는 애를 달래려고 손에 잡히는 대로 노래를 흥얼거렸을 뿐인데, 그게 어느새 '아이 잘 보는 시녀'라는 소문으로 부풀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이렇게 부메랑이 될 줄이야.' 헤르타 언니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통보하듯 말했다. "네가 령녀님 전담 시녀로 배정됐다. 오늘부터니까 정신 차려." 나는 잠깐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반박은 일을 늘린다. 그건 진리였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는데, 그건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랜만에 느껴본 확신에 가까운 감각이었다. '이게 바로 그거였구나.' 원작에서 리아의 초대 전담 시녀는 이름도 없이 몇 줄 지나가듯 언급되고 사라지는 조연이었는데, 그 자리에 내가 앉게 된 것이었다. 여덟 살 시녀 채미리가 다섯 살 공작령녀의 인생을 좌우할 자리에 앉게 됐다는 사실이, 웃기면서도 소름 끼쳤다. '작가가 자기가 쓴 조연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되다니, 이런 전개는 나도 안 써봤는데.' 헤르타 언니는 내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뭔가 오해했는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너무 겁먹지 마라. 다섯 살이면 애 손 좀 타는 것뿐이지.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나는 무섭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기 전, 나는 헤르타 언니에게 앞으로 지켜야 할 규칙을 빠르게 전달받았다. "령녀님 방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말고, 부르시기 전에는 말도 걸지 마라.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문 앞에 놓고, 목욕은 시중을 들되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하시니 조심해라." 그 지시들을 하나씩 들으며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정보와 대조하기 시작했다. '방치, 최소한의 접촉, 정서적 고립.' 게임 프롤로그의 배경 설정 그대로였다. 헤르타 언니는 규칙을 나열하는 사이사이 한숨을 섞었는데, 그건 걱정이 아니라 순전히 업무량에 대한 한숨이었다. "공작가에서 붙여준 시녀가 있었다는데 그것도 얼마 못 버티고 나갔다더라. 너도 오래 버티라고는 안 하겠다만, 최소한 사고는 치지 마." 나는 규칙을 받아 적는 척하며 속으로는 전혀 다른 목록을 만들고 있었다. 리아가 처음 몇 달간 겪게 될 사건들, 그중 내가 막아야 할 순서. 마력이 처음 폭주하는 시점, 그로 인해 다치는 하녀, 그 하녀의 원망, 그리고 그 원망이 쌓여 만들어질 훗날의 균열까지. 나는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이 저택에 나 하나뿐이었다. 마차 소리가 정문에서 들려온 건 해가 완전히 저물기 직전이었다. 하늘은 주황과 남색이 뒤섞여 경계가 흐릿했고, 정원의 새로 심은 꽃들은 아직 뿌리를 채 내리지 못한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다른 시녀들과 함께 현관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손이 떨리는 걸 감추려고 앞치마 자락을 꽉 쥐었다. 옆에 선 견습 시녀 하나가 작게 속삭였다. "쟤가 그 소문의 애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그 애를, 내가 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슬프게 그려냈던 그 아이를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심장을 조여올 줄은 몰랐다. 마차가 정문을 지나 저택 앞마당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이내 멈췄다. 말발굽 소리도 끊겼다. 정적이 짧게 흘렀고, 그 정적 속에서 내 심장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차 문이 열리고, 작은 발이 계단에 내려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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