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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마차에서 내린 아이는 은발이었다. 달빛을 그대로 짜서 만든 것 같은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그 아래 자주색 눈동자는 또래 아이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고요했는데, 나는 그 눈을 마주친 순간 게임 프로모션 이미지에서 수백 번 봤던 그 얼굴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이거 진짜 원화보다 낫잖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한심했지만, 동시에 직업병처럼 머릿속에서 원작 스틸컷과 실물을 대조하고 있었다. 우안, 오른쪽 눈가에는 옅게 백색 꽃잎 모양의 문양이 피어 있었는데, 그건 원작에서 '화안'이라고 부르던 것으로 천사와 타천사 혼혈에게만 나타나는 표식이었다. 실제로 보니 그림보다 훨씬 섬세했고, 마치 정말로 피부 위에 작은 꽃이 자라난 것처럼 보였다.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면 정말 꽃잎처럼 얇을까 하는 부질없는 궁금증이 스쳤지만, 그 앙증맞은 표식 밑에 얼마나 무시무시한 설정값이 붙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이 저택에서 나 혼자였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그런 표식을 달고, 그런 눈빛으로 저택을 훑어보고 있는 광경은 어딘가 비현실적이었다. 리아는 마중 나온 시녀들을 하나씩 눈으로 훑었는데,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이 놀랍게도 경계보다는 무관심에 가까웠다.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마부, 계단 옆에 늘어선 화분, 저택의 정문 문양까지 순서대로 눈에 담고는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쳐버리는 그 시선이 나는 오히려 더 마음에 걸렸다. '벌써 지쳤나.' 다섯 살이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게임에서는 그 무표정을 '조숙함'이라는 한 단어로 처리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건 조숙함이 아니라 학습된 방어였다. 계속 기대하고 계속 상처받다가, 결국 아예 기대를 접어버린 아이의 표정. 원작 텍스트로 읽을 때는 그냥 캐릭터 설정 한 줄이었는데, 실물로 보니 그 한 줄 뒤에 숨어 있던 무게가 명치를 툭 치고 지나갔다. 헤르타 언니가 앞으로 나서서 인사를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령녀님. 지헌 백작가에서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목소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는데, 아마 백작가의 명예를 걸고 준비한 환영사였을 것이다. 리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 걸음걸이가 또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고 동시에 훨씬 외로워 보였다. 발끝을 정확히 계단 중앙에 맞춰 딛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에게 걸음걸이까지 검사받으며 자란 아이 같았다. 시녀들이 서둘러 뒤를 따르는 와중에 나는 잠깐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었다. '진짜구나.' 이 세계가 진짜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저 아이의 걸음걸이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에야 비로소 그 사실이 뼈에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짐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지금 여기서 멍하니 서 있다가는 신입 시녀 딱지가 붙기도 전에 얼빠진 애로 낙인찍힐 판이었다. 방으로 안내하는 동안 리아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걸려 있는 초상화나 태피스트리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고,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나는 그 옆에서 짐을 나르며 힐끔거렸는데, 아이의 손끝이 유독 차가워 보였다. 손등에 핏줄이 살짝 도드라져 보일 만큼 피부가 얇았고, 그 위로 저택 등불의 주황빛이 스치는데도 온기가 스며드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저택은 난방이 잘 되는 편이었지만 그 손은 마치 바깥의 밤공기를 그대로 쥐고 있는 것 같았다. '마력이 몸의 열을 계속 갉아먹고 있는 거구나.' 원작 설정에 적어놓았던 문장이 떠올랐다. 조기 각성한 마력은 안정화되기 전까지 신체의 항상성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그 첫 증상이 바로 손발의 냉감이었다.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메모까지 해둔 사람이었는데, 그때는 이게 텍스트가 아니라 진짜 사람의 체온으로 나타날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방에 도착하자 리아는 곧장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내려다봤다. 나는 짐을 정리하며 곁눈질로 그 뒷모습을 살폈는데,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추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벽난로 쪽으로 다가가 불씨를 키웠다. 장작을 하나 더 얹고 부젓가락으로 불씨를 살살 흩어놓는 사이에도 리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령녀님, 추우시면 말씀해 주세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 반응 없이 이불을 하나 더 꺼내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뭐, 첫날부터 친해질 거라 기대한 것도 아니고.' 나는 속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시녀 일 년 차의 미덕은 상대가 대답을 안 해도 서운해하지 않는 뻔뻔함이었다. 그날 밤, 나는 옆방에서 대기하다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였는데, 마치 공기 자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벌레 소리인가 싶어 대충 넘기려다가, 그 웅웅거림이 점점 벽을 타고 선명해지는 걸 느끼고 나서야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여다봤는데, 리아가 침대 위에 앉아 두 손을 앞으로 뻗은 채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손끝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그러지며 물건들이 아주 살짝, 눈으로 겨우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떠오르고 있었다. '중력 조작.' 원작에서 리아가 다섯 살에 처음으로 발현시킨 능력이었는데, 그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설정집 페이지 어딘가에 각성 시기를 적어두었던 게 기억났고, 나는 그 날짜가 오늘이라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리아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 표정에 두려움과 흥미가 뒤섞여 있는 걸 보니 이건 훈련된 마법이 아니라 순수한 폭주의 초기 단계였다. 탁자 위의 촛대가 흔들리고, 컵이 살짝 떠올랐다가 도로 떨어지며 쨍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리아가 놀라 손을 움츠렸고, 그 즉시 방 안의 진동도 잦아들었다. 아이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또 이러네." 그 목소리에는 짜증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닌, 그저 익숙한 실망감만이 담겨 있었다. 마치 이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이미 몇 번쯤 겪어본 사람의 말투였다. 나는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 촛대와 컵을 정리하는 척하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많이 놀라셨죠. 제가 정리할게요." 최대한 목소리를 담담하게 깔았는데,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리아가 나를 힐끗 쳐다봤는데, 그 눈에 담긴 감정이 놀랍게도 경계가 아니라 옅은 놀라움이었다. 아마 이전 사람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소리를 지르거나 도망쳤을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촛대를 세우고 컵의 물을 닦았는데, 그 태도 자체가 리아에게는 처음 겪는 반응이었을지도 몰랐다. 사실 나라고 무섭지 않았을 리 없었다. 다만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이 순간 도망치는 선택지는 애초에 내 목록에 없었을 뿐이다. "무섭지 않아?" 리아가 물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숨긴 기대가 나에게는 너무 뚜렷하게 들렸다. 나는 컵을 내려놓고 잠깐 생각하는 척을 하다가 대답했다. "조금 놀랍긴 한데, 무섭진 않아요." 그건 절반의 진실이었다. 나는 이 힘의 끝이 어떤 파국으로 이어지는지 알고 있었으니 두렵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두려움의 대상은 리아가 아니라 리아를 둘러싼 세계였다. 리아는 그 대답에 잠깐 눈을 깜빡이더니,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움직였다. 웃음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그러나 분명히 조금은 풀린 표정이었다. 나는 그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봤는데, 다섯 살짜리 아이의 표정 하나에 이렇게 안도한 내가 조금 우습기도 했다. "이불 하나 더 덮을까요?" 나는 아까 올려둔 이불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리아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불을 끌어 올려 리아의 무릎까지 덮어주었는데, 그 손끝이 이불 자락에 닿는 순간에도 여전히 서늘했다. '식지 않는구나.'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원작 설정의 다음 문장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냉감은 시작일 뿐이고, 그다음엔 발열이, 그다음엔 무의식적인 폭주 빈도의 증가가 이어진다는 문장들이었다. 그날 밤 나는 리아가 잠들 때까지 그 방에 머물렀다. 창밖으로 달빛이 리아의 은발 위에 내려앉는 걸 보면서, 나는 이 아이의 손을 이 세계의 결말로부터 붙잡아야 한다는 확신을 다시 한번 굳혔다. 하지만 그 확신 뒤편에서, 방금 컵이 떠올랐던 그 짧은 순간의 진동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떠올리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진동의 폭이 원작 초반 서술보다 훨씬 크고 잦았다는 사실을, 나는 애써 외면하려 했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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