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눈을 떴다.
동굴 밖이었다.
일행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하늘이 이상하게 밝았다.
분명 동굴에 들어갈 때는 오후였는데.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이도현!"
정민호 선생님이 소리쳤다.
"경로를 벗어나면 어떡해!"
선생님의 얼굴이 붉었다.
안경 너머로 눈이 부풀어 있었다.
정말로 화가 난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는 대답했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목이 잠겨 있었다.
마치 몇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어디 갔었어?"
선생님이 물었다.
"넘어졌다가 정신을 잃었어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거짓말을 할 때마다 손끝이 저렸다.
그런데 이번엔 아무렇지 않았다.
동굴, 목소리, 손, 계약.
그 어느 것도 말할 수 없었다.
말할 수 없다는 것보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 감각이 더 컸다.
그 사실이 이상했지만, 이상하다는 생각도 오래가지 않았다.
태오가 옆에서 나를 훑어봤다.
"몰골이 그게 뭐야."
태오가 말했다.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옷에 흙이 묻어 있었다.
손등에 긁힌 자국이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들이 어디서 생긴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목소리가 있었다.
손을 잡았다.
계약, 이라고 했다.
그것 말고는 흐릿했다.
마치 안개 속에서 몇 개의 단어만 건져낸 것처럼.
일행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맨 뒤에서 따라갔다.
발끝이 무거웠다.
오후 5시.
마차가 학원으로 돌아왔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손을 계속 들여다봤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손등을 뒤집어 봤다.
손바닥을 펴 봤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계약서 같은 것도, 낙인 같은 것도, 흔적 같은 것도.
정말 있었던 일일까.
혹시 그냥 꿈이었을까.
머리를 부딪힌 충격으로 잠깐 헛것을 본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어딘가에, 아주 작은 실망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그 실망이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마차 창밖으로 학원 건물이 보였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삼 년 동안 매일 본 담벼락, 매일 본 지붕.
그런데 오늘은 그 풍경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뭐가 다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오전 8시.
실기 수업이었다.
교실 안 공기가 차가웠다.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은 창밖 풀밭이 보였다.
정민호 선생님이 학생들을 순서대로 불렀다.
이름이 하나씩 불릴 때마다 지팡이 끝에서 빛이 터졌다.
어떤 아이는 화염을, 어떤 아이는 얼음을, 어떤 아이는 바람을 일으켰다.
나는 늘 그렇듯 맨 나중이었다.
이름이 불릴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가장 싫었다.
다른 애들의 시선이 등 뒤에 꽂히는 걸 느꼈다.
저 자식은 또 아무것도 못 하겠지, 하는 눈빛들.
"이도현, 시전."
나는 지팡이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주문을 외웠다.
마력을 모았다.
삼 년째 항상 같았다.
아무것도 모이지 않았다.
오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주문 마지막 음절을 뱉으면서 이미 실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내리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다음 순서로 넘어가는 익숙한 흐름을.
그런데.
손끝이 뜨거워졌다.
지팡이 끝에서 뭔가 반짝였다.
처음엔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다.
눈을 깜빡였다.
빛은 사라지지 않았다.
작은 불꽃이었다.
초급 화염 마법.
삼 년 만에 처음이었다.
"어."
나는 놀라서 지팡이를 놓쳤다.
불꽃이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실기장이 조용해졌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방금 뭐였지."
누군가 말했다.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정민호 선생님이 다가왔다.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봤다.
선생님의 눈빛에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삼 년간 아무것도 못 하던 학생이 갑자기 뭔가를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우연이겠지."
선생님이 말했다.
표정에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다는 그 표정이, 오히려 더 아팠다.
삼 년 동안 나를 향한 시선이 항상 그런 종류였다.
기대 없음.
"다시 해봐라."
나는 지팡이를 다시 들었다.
손끝의 감각을 기억하려고 애썼다.
아까 그 뜨거움이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
주문을 외웠다.
또 불꽃이 일었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지팡이 끝에서 손가락 두 마디만 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잠깐 허공에 머물다가, 스스로 사그라들었다.
실기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이번엔 다른 종류의 조용함이었다.
아까는 의아함이었다면, 지금은 뭔가 다른 것이었다.
경계, 혹은 그 비슷한 것.
"이게."
선생님이 중얼거렸다.
말을 끝맺지 못했다.
태오가 팔짱을 끼고 나를 봤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태오는 이 학년 중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아이였다.
입학 첫날부터 중급 마법을 다뤘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 같은 낙오자와 같은 반에 있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했던 아이였다.
"뭐야, 갑자기."
태오가 말했다.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어제까지 아무것도 못 하던 놈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따뜻했다.
그 안에 뭔가 흐르고 있었다.
삼 년간 없던 것이.
마력.
그것이 마력이라는 걸,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삼 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몸속을 도는 낯선 흐름.
선생님이 손을 들어 다른 아이를 불렀다.
수업이 계속됐다.
하지만 나를 향한 시선들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몇몇 아이들이 힐끔거리며 나를 봤다.
오후 2시.
두 번째 아르바이트를 가는 길이었다.
식당 뒷골목에서 지팡이를 꺼내 봤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낡은 벽돌 벽을 향해 섰다.
주문을 외웠다.
불꽃이 손끝에서 피어났다.
이번엔 아까보다 컸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불덩이가 지팡이 끝에서 일렁였다.
나는 골목 벽에 대고 마법을 쏘았다.
작은 폭발음이 났다.
벽에 그을음이 남았다.
검은 자국이 벽돌 위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 자국을 보는 순간, 손이 떨렸다.
무서웠다.
동시에, 뭔가가 벅찼다.
이 두 감정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게 이상했다.
두려움과 기쁨이 한 몸에서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
진짜였다.
계약은 진짜였다.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다.
목소리도, 손을 잡던 감촉도, 계약이라는 말도.
그 존재는 진짜로 힘을 줬다.
나는 지팡이를 다시 들었다.
한 번 더 마법을 쏘았다.
불꽃이 또 벽을 태웠다.
세 번째로 쏘았을 때, 손끝이 조금 저려왔다.
마력이 바닥까지 긁히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이 힘이 진짜인지, 얼마나 쓸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식당 안에서 사장님이 나를 불렀다.
시간이 다 됐다는 뜻이었다.
나는 지팡이를 챙기고 앞치마를 둘렀다.
손끝에 남은 열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오후 6시.
원장님이 나를 불렀다.
식당 일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였다.
원장님은 부엌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학원에서 연락 왔던데."
원장님이 말했다.
표정이 이상했다.
"네가 갑자기 마법을 쓰기 시작했다며."
"네."
"어떻게 그런 거야."
원장님의 눈에는 걱정과 의심이 섞여 있었다.
삼 년 동안 나를 지켜본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못 하던 아이가 갑자기 뭔가를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좋은 소식만은 아니라는 걸 아는 눈이었다.
나는 대답을 고르며 잠시 침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동굴에서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목소리, 손, 계약.
그 단어들을 입 밖에 내는 순간 뭔가 무너질 것 같았다.
"연습을 많이 했어요."
거짓말이 또 나왔다.
두 번째 거짓말이었다.
이번에도 손끝이 저리지 않았다.
거짓말이 이렇게 쉽게 나온다는 게, 낯설었다.
원장님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다.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뭔가 더 물으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하지만 더 묻지 않았다.
"밥은 먹었어?"
원장님이 물었다.
"아직요."
"먼저 먹여야겠구나."
원장님이 부엌으로 향했다.
뒷모습이 익숙했다.
삼 년 동안 봐온 뒷모습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대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뭐가 됐든, 별거 아닌 거라고 했다.
동굴 안에서 그 목소리가 그렇게 말했었다.
힘을 줄 테니, 대가를 받겠다고.
대가가 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별거 아니라고만 했다.
나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부엌에서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원장님이 밥을 차리는 소리였다.
평소와 똑같은 소리였다.
밤 9시.
보라가 방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보라가 서 있었다.
평소보다 얼굴이 상기돼 있었다.
"소문 들었어."
보라가 말했다.
눈이 커져 있었다.
"너 마법 쓴다며?"
"어."
"진짜야?"
보라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불안이 섞여 있었다.
보라는 나와 같이 밭일을 하며 자란 아이였다.
학원에서 마법을 배우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사는 아이였다.
나는 손끝에서 작은 불꽃을 피워 보였다.
보라가 숨을 삼켰다.
방 안의 어두운 공기 속에서 불꽃이 유난히 밝게 빛났다.
보라의 눈동자에 그 빛이 어렸다.
"어떻게 된 거야."
"몰라."
대답이 짧았다.
사실이었다.
정말 몰랐다, 그때는.
동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게 이상했지만, 그 이상함을 오래 붙잡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럼 이제."
보라가 말을 멈췄다.
문틀에 기대선 채,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농사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보라가 묻고 싶었던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농사일을 그만두는 거냐고, 이제 학원에서 진짜 학생이 되는 거냐고,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보라의 얼굴에 뭔가가 스쳤다.
서운함 같기도, 두려움 같기도 한 것.
"잘됐네."
보라가 겨우 말했다.
웃음이었는데, 웃음 같지 않았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는 그 표정을 봤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예전이었다면, 이 순간 뭔가 마음이 무거워졌을 것이다.
보라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나는 늘 신경이 쓰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보라가 슬퍼 보이면 나도 덩달아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런데 그 느낌이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흩어졌다.
마치 원래부터 없던 것처럼.
보라가 몇 마디 더 하고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방금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이미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밤 11시.
나는 침대에 누워 손을 봤다.
작은 불씨가 손끝에서 피었다 사라졌다.
천장을 향해 손을 뻗은 채, 몇 번이고 불꽃을 만들었다 지웠다.
삼 년의 실패가 하루아침에 뒤집혔다.
용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들이 그려졌다.
실기 수업에서 인정받는 나, 태오 같은 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나, 어쩌면 정말 용사 후보로 뽑히는 나.
그런데 잠들기 직전, 이상한 생각이 스쳤다.
보라가 방을 나가면서 짓던 표정.
분명 서운했을 텐데,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쓰였을 텐데.
밤새 그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다음 날 아침 사과라도 하러 갔을 텐데.
지금은 그냥, 아무 느낌이 없었다.
느껴야 하는데,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손끝의 불씨를 다시 한 번 피워봤다.
따뜻했다.
그 온기가 손끝에서 손목으로, 팔로 번지는 것 같았다.
그 온기와 비교해서, 마음 어딘가는 자꾸 서늘하게 비어 있었다.
나는 그 생각을 애써 밀어냈다.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도 손끝의 잔열이 느껴졌다.
내일 아침이면, 실기장에서 다시 불꽃을 피워야 했다.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그 두근거림이 기대인지, 다른 무엇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잠이 들기까지, 나는 계속 손끝을 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