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종마 대신 대공 하겠습니다

1화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지독하게 눈이 부시다는 것이었다. 마치 형광등 스무 개를 한꺼번에 얼굴에 들이댄 것 같은 광량이었는데, 눈꺼풀을 감았다 뜨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나는 그저 눈물부터 줄줄 흘려야 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는데, 그 이상함의 정체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는데 움직인 건 주먹만 한 뭉치였고, 목소리를 내려 했는데 나온 건 째지는 울음소리였으며, 시야에 잡히는 세상의 크기가 어른의 눈높이가 아니라 마치 바닥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는 각도였다는 것을, 나는 몇 초 만에 받아들여야 했다. 팔다리의 비율도 이상했다. 몸통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크고 무거워서, 목을 가누는 것 자체가 무슨 대단한 근력 훈련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갓난아기가 되어 있었다. 마흔둘, 야근이 3주째 이어지던 어느 새벽, 화장실 바닥에서 심장이 멎었던 그 순간까지는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박도현. 그게 내 이름이었고,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버티던 회사원이었으며, 결혼도 못 해보고 그렇게 갔으니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사치스러웠다는 게 마지막 감상이었는데... 팀장이 던진 서류 뭉치가 책상 위로 떨어지던 소리, 형광등이 깜빡거리던 회의실,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때운 끼니들이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웬 낯선 방의 요람 안에서 팔다리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게, 되네...?' 하는 실없는 감탄이 먼저 튀어나온 걸 보면, 나는 죽어서도 정신머리는 여전했던 모양이다. 마흔둘 먹고 죽었는데 다시 0세부터 시작이라니, 인생 리셋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할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방 안의 풍경은 낯설었다. 돌로 쌓은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는 색이 바랜 채로 낡은 문양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낡은 성벽은 이끼가 낀 채 오랜 세월을 버텨온 티가 났다. 방 한쪽에는 화로가 놓여 있어 은은한 온기가 퍼지고 있었는데, 그 냄새마저도 익숙하지 않은 향이었다. 나무 타는 냄새에 뭔가 약초 비슷한 향이 섞여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는 여인의 얼굴. 검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 여인은 나를 안아 올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는데, 그 말이 놀랍게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처럼 귀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이 세계의 언어가 자동으로 번역되어 뇌에 새겨지는 듯한 감각이었으니까, 아마 이것도 전생이라는 사건에 딸려 온 어떤 부가 기능이려나 싶었다. '죽어서 다른 세계 갔더니 번역기까지 서비스로 붙는구나. 개사긴데?'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준아." 그녀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이수현. 나중에 알게 된 이름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그저 낯선 여인의 목소리로만 들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갓 태어난 자식을 바라보는 애정과 함께, 뭔가를 경계하는 듯한 긴장이 동시에 배어 있었는데, 그때는 그게 단순한 산모의 불안인 줄로만 알았다. 그녀는 나를 안은 채 창가로 걸어가 밖을 한 번 내다보고는, 다시 커튼을 여미고 방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동작 하나하나가 마치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사람의 몸짓 같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때의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모를 일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나는 이 세계에 대해 조금씩 정보를 주워 모았다. 갓난아기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눈을 뜨고 주변의 소리를 흡수하는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꽤 많은 그림이 맞춰졌다. 시녀들이 오가며 나누는 대화, 문밖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들, 그런 걸 종합해보면 대략의 그림이 그려졌는데, 요컨대 이곳은 마력을 가진 여성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청람 왕국이라 불리는 이 나라에서는 여성만이 마력을 타고났고, 남성은 태어날 때부터 '기초소질'이라는 수치로 가치가 매겨진다고 했다. 시녀 하나가 다른 시녀에게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옆 영지에서 최상급 남아가 나왔다더라, 그 집안이 벌써 삼대가 떵떵거리며 산다더라" 하는 식의 대화였다. 그 말투에는 시기와 부러움이 반쯤씩 섞여 있었는데, 그게 이 세계에서 남자의 가치를 매기는 일반적인 시선이라는 걸 나는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기초소질이란 쉽게 말해 그 남성이 자식에게 얼마나 좋은 마력 자질을 물려줄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였고, 그 수치가 높을수록 명문가에서 서로 데려가려 하는 '종마'로 팔려나간다는 것이었다. 종마라니. 웬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이렇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니,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내가 씨받이가 된다고?' 하는 생각이 스치자, 갓난아기의 몸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전생에는 결혼도 못 해보고 죽었는데, 이번 생에는 아예 선택권 자체가 없이 누군가의 씨앗으로 팔려나간다니, 이건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재앙이었다. 그리고 태어난 지 정확히 칠 일째 되던 날, 그 소문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방 안에는 흰 사제복을 입은 여성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왕국 신전에서 파견된 감정관이었다.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고, 표정에는 이런 절차를 수백 번은 반복해봤을 법한 무심함이 배어 있었다. 손에는 투명한 수정구를 들고 있었고, 그것을 내 이마에 가볍게 가져다 대는 순간, 나는 온몸이 저릿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몸속의 뭔가가 스캐너에 훑히는 듯한 기분이었으니까, 아마 이 세계식으로는 이게 곧 '감정' 절차였을 것이다. 수정구 안쪽에서 옅은 빛이 소용돌이치듯 돌더니, 이내 그 빛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감정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요람에 누운 채로도 느낄 수 있었다. [기초소질 감정 결과] 대상: 이하준 3세 등급: 측정불가 (한계치 초과) 감정관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걸, 나는 요람에 누운 채로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 이런 수치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수정구를 다시 확인했고, 재차 같은 결과가 나오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에 든 수정구를 몇 번이고 흔들어보고, 다시 내 이마에 가져다 대기를 반복했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다. "신전 역사상 기록된 최고 등급이 최상급인데, 이 아이는 그 최상급 측정 한계마저 넘어섰습니다. 저로서는... 정확한 수치를 산출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완전히 갈라져 있었고, 손에 든 수정구를 마치 뜨거운 물건인 것처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는 걸, 갓난아기인 나조차 감지할 수 있었다. 최상급이라는 등급 자체가 원래도 극히 드물어서, 그런 남아가 태어나면 즉시 왕실에 보고되고 명문가들 사이에서 경매가 벌어질 정도라고 했는데, 그 한계마저 뚫어버린 수치라니. '축하할 일인가, 아니면 완전히 망한 건가' 하는 계산이 머릿속에서 빠르게 돌았지만, 결론은 후자에 훨씬 가까웠다. 남들은 최상급 하나만 나와도 온 가문이 축제 분위기라던데, 나는 그 최상급마저 뛰어넘어 버렸으니, 이건 축복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의미의 표적이 된 거였다. 마치 시험에서 만점을 넘어서는 점수를 받아버린 셈인데, 그게 기뻐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지 자체가 잘못 채점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감정관은 곧바로 법령을 읊었다. "왕국법에 따라, 최상급 이상으로 판정된 남아는 감정일로부터 백 일 이내에 왕실 종마원에 보고 및 이송되어야 합니다. 이는 예외 없는 규정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유감이나 동정 같은 감정이 전혀 섞여 있지 않았는데, 이 세계에서는 그게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아이가 값비싼 씨앗으로 팔려나가는 것이, 여기서는 그저 절차의 일부였으니까. 그녀는 품에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꺼내 뭔가를 빠르게 적어넣었고, 그중 한 장을 이수현에게 내밀었다. "이 서류에 서명하시면 절차가 시작됩니다. 이송일은 신전에서 별도로 통지할 것이며, 그 전까지 아이는 이 저택에서 보호받게 됩니다." 백 일.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뒤늦게 무게를 갖고 내려앉았다. 백 일 뒤에는 나는 이 방을 떠나, 얼굴도 모르는 명문가에 팔려가 평생을 씨받이로 살아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게, 시한부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시한부처럼 살다가 죽었는데, 이번 생에는 아예 출생과 동시에 시한부 딱지가 붙어버린 셈이었다. 이름은 하준인데 이렇게 되면 이름값도 못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실없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지금 이름 타령할 때가 아니라는 걸 곧 깨달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수현의 표정에서 나는 뭔가 다른 것을 읽었다. 두려움도, 절망도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관이 방을 나서자마자 나를 품에 꼭 안으며,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그저 좋은 씨앗이 아니야." 그녀의 손끝이 내 이마를 가만히 짚었고,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손끝에서 미약하게 흘러드는 낯선 진동을 느꼈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가 그 진동에 반응하듯 조용히 요동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그때의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진동이 지나가는 동안, 내 몸 안쪽 어딘가가 미세하게 뜨거워지는 감각이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방문을 다시 한번 확인하듯 바라보더니, 시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요람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백 일. 그 안에 방법을 찾아야 해." 그녀의 눈빛은 감정 결과지를 받아든 순간부터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의 긴장과 불안이 이제는 어떤 결의로 바뀌어 있었으니까. 그녀가 뭔가 위험한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갓난아기의 몸으로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심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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