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감정관이 다녀간 이후, 남작저의 분위기는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안으로는 팽팽하게 당겨진 실 같았다. 하녀들은 여느 때처럼 복도를 오가며 걸레질을 하고 식사를 나르고 빨래를 걷었지만, 그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요람에 누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택 전체가 숨을 참고 있었으니까. 이수현은 그날 이후 사흘 밤낮을 서재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조사했는데, 나는 그저 요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신세였으니까 그녀가 정확히 뭘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갓 태어난 지 열흘도 안 된 몸으로 서재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저기, 저도 좀 알려주시죠"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천장의 나뭇결 무늬를 세는 것뿐이었다.
다만 하녀들이 오가며 수군거리는 말들, 그리고 사나흘 만에 초췌해진 얼굴로 나타난 그녀를 보면, 뭔가 만만치 않은 결심이 그 안에서 익어가고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마님이 밤새 신전 관련 서류를 뒤지신다는데." "감정관 쪽에 사람을 붙이셨다더라." "이번엔 진짜 큰일 나는 거 아니냐." 그런 말들이 복도를 스치듯 지나갈 때마다, 나는 속으로 '큰일이라니, 나 때문인가?' 하고 되물었는데, 정확한 답은 나올 리가 없었다. 갓난아기에게 정보력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그녀는 낯선 손님을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은발이 허리까지 늘어진, 귀 끝이 뾰족한 여성이었다. 다크엘프였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과 엘프가 함께 어울려 사는 편이었지만, 다크엘프는 그보다 훨씬 드문 존재였다는 걸, 하녀들의 놀란 눈빛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몇몇은 대문 앞까지 나와 곁눈질을 하며 소곤거렸고, 어떤 이는 아예 눈도 못 마주친 채 고개를 숙였는데, 그 반응이 마치 왕족을 마주한 것 같은 태도여서, 나는 이 손님이 그저 지나가는 용병 나부랭이는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설하늬였다. 이수현이 마족전쟁 시절부터 함께해온 전우이자 심복이라고,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부르셔서 왔습니다만, 은퇴한 늙은이한테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요." 설하늬가 팔짱을 끼며 물었는데, 그 말투는 스스럼없었다. 위계라는 게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사이였다. 실제로 그녀의 걸음걸이며 어깨를 늘어뜨린 태도는, 남작이라는 호칭 앞에 예를 갖추기는커녕, 오래 알고 지낸 술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이 아이를 봐줬으면 해." 이수현이 나를 안아 그녀 앞에 내밀며 말했고, 설하늬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가, 곧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 변화가 얼마나 순식간이었는지, 방금까지 시큰둥하던 눈이 순간적으로 확 커지는 걸 나는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이거, 뭡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방금 스쳤는데, 이 아이한테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습니다. 남자아이한테서요." 그녀는 마치 확인이라도 하듯 손끝을 내게 가까이 가져왔는데, 그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저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화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원한 것도 아닌,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감각이었다.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되물었다. '마력의 파동? 나한테서?' 이 세계의 남성은 마력을 갖지 못한다는 걸, 나는 이미 하녀들의 대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남성에게 있는 건 오직 기초소질, 즉 딸에게 물려줄 마력의 씨앗뿐이지, 스스로 마력을 다루는 남성은 청람 왕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설하늬는 나에게서 마력의 파동을 느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되는 거였어?'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동시에 뭔가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왕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던 일이, 하필 내 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게, 축복인지 재앙인지 판단이 안 섰으니까.
"기초소질이 측정불가로 나왔어." 이수현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감정관도 산출을 못 할 정도로 한계를 넘어섰다는 거야. 그런데 나는 이걸 단순한 씨앗의 질로만 볼 수가 없어. 이 아이는... 스스로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존재일 가능성이 있어."
설하늬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가, 곧 낮게 웃음을 흘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왕국 전체가 뒤집힐 일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반신반의와 흥분이 뒤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 감정의 온도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풀고, 대신 턱을 매만지며 나를 몇 번이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값을 매기는 감정사의 눈초리 같아서, 나는 괜히 요람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알 수 없는 힘의 흔적이 감지되었습니다.]
그런 문구가 머릿속에 떠오른 건 그 무렵부터였다. 처음에는 헛것을 보는 줄 알았는데, 곱씹어보니 이건 분명히 이 세계의 시스템 같은 무언가가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스탯창 같은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정확히 뭘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손을 뻗어 뭔가를 눌러본다거나, '스탯창 오픈' 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외쳐본다거나 하는 시도를 해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 세계가 나한테 친절할 이유가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을 뿐이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 세계가 나에게 뭔가 특별한 규칙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규칙이 축복인지, 아니면 더 지독한 굴레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이수현은 그날 밤, 설하늬와 오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대화의 전부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몇 마디는 또렷하게 기억에 남았다.
"백 일 안에 왕실에 보고해야 하는데, 그 전까지 최대한 이 아이의 진짜 재능을 확인해야 해." 이수현이 말했다. "감정관은 이미 매수했어. 등급을 낮춰 재보고할 거야. 최상급이 아니라 상급 정도로."
"위험한 도박이군요." 설하늬가 낮게 말했다. "발각되면 남작가 전체가 몰살당할 겁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잠시 침묵했는데, 그 침묵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나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방 안의 촛불이 흔들리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한 순간이었다.
"알고 있어." 이수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아이를 그냥 종마원에 내주는 건, 그보다 더 큰 손실이야. 만약 이 아이의 재능이 내가 생각하는 것 그대로라면... 이건 왕국의 역사를 바꿀 존재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죽어서 다시 태어난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태어난 지 열흘도 안 되어 왕국의 역사를 바꿀 존재로 지목되어버린 신세라니. '이거, 웃어야 하는 상황인가...' 싶었지만, 어쩐지 그 헛웃음마저 나오지 않았다. 전생에서는 그저 하루하루 병원비를 걱정하며 살던 처지였는데, 이번 생에서는 태어나자마자 왕국의 운명을 짊어질 존재라니, 이쪽으로나 저쪽으로나 팔자가 참 기구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수현의 계획은 이러했다. 감정관을 매수해 등급을 낮춰 보고함으로써 종마원 이송을 피하고, 그 대신 남작저 안에서 은밀하게 나를 시험해보겠다는 것이었다. 방법은 파격적이었다. 그녀는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 재능을 가장 빠르게 끌어올린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그녀가 마족전쟁에서 몸소 체득한 육성관이라고 했다. "안전한 온실에서는 절대 진짜 재능이 드러나지 않아. 극한의 상황이 되어야, 비로소 진짜 그릇이 드러나는 법이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설하늬에게 나를 맡겼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요람 속에서 조용히 몸을 떨었다. '극한의 상황이라니, 그거 나한테 하는 소리 맞지...?' 갓 태어난 몸으로 극한의 상황이라는 게 대체 어떤 걸 의미하는지, 상상만으로도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물론 진짜로 땀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런 비유가 아니고서는 이 불안감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설하늬는 그날부터 남작저에 상주하기로 했다. 명목상으로는 몰락한 남작가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고용된 용병이었지만, 실제로는 나의 교육자이자 감시자였던 셈이다. 그녀는 짐이라고 할 것도 별로 없는 작은 배낭 하나를 어깨에 걸친 채, 저택 뒤편의 별채를 자신의 거처로 삼겠다고 통보했는데, 그 태도가 어찌나 당당한지, 마치 원래부터 이 집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하녀들 몇몇은 그녀의 뒷모습을 흘긋거리며 수군댔지만, 정면으로 말을 붙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나를 안아 올리며 낮게 웃었던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어디 한번 보자꾸나. 네가 정말 그 정도로 대단한 녀석인지." 그녀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함께, 이미 어떤 기대감이 배어 있었는데, 그 기대가 얼마나 어긋날지는 그녀 자신도 그때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요람에 누워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감정관의 재보고서가 왕실로 올라간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이수현은 그날 아침, 서재에서 나온 뒤 처음으로 웃는 얼굴을 보였는데, 그 웃음이 진짜 안심에서 나온 건지,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위험을 애써 외면하려는 몸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등급은 상급으로 조작되어 있었지만, 원본 기록은 여전히 신전 문서고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종이 한 장이었을 뿐인데, 그 한 장이 남작가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그 사실이, 나중에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 채, 시간은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