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파멸 확정인데 성실이라니

2화

마법 수업 첫날, 나는 다짐했다. 딱 삼 급 마법 정도만 쓰는 척하자. 원작에서 <허공>이 각성하는 시점은 열 살, 파멸 직전이었으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여덟 살짜리가 뭘 각성해봤자 얼마나 하겠어. 촛불 하나 켜는 정도면 딱 적당하다. 마법 교사 앞에서 살짝 미숙한 척, 아이답게 서툰 척, 그렇게 삼 급짜리 코스프레만 하면 오늘 하루는 무사히 넘어갈 줄 알았다. 라고 생각한 게 삼십 분 전이었다. 연무장은 아침 공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아 서늘했다.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고, 나는 그 냉기보다 더 서늘한 예감을 애써 무시하며 마법 교사 앞에 섰다. 교사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공작가에 오래 봉직한 티가 나는지 말투 하나하나에 격식이 배어 있었다. "자, 진 도련님. 마력을 손끝에 모아보세요. 촛불처럼, 작게." 마법 교사가 시범을 보였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불씨가 톡, 하고 피어올랐다. 성냥불 정도의 크기였다. 딱 저 정도. 저 정도만 하면 된다. 나는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저 정도, 저 정도, 저 정도만. 나는 눈을 감고 마력을 모으는 데 집중했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뭔가 물결처럼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랫동안 잠겨 있던 수문이 삐걱, 하고 열리는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딱 한 방울만 흘려보내자고 생각했다. [출애굽기 3:2,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더라] 사라지긴커녕, 커졌다. 촤르르르륵! 손끝에서 뭔가 잘못된 소리가 났다. 불이 아니었다.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마치 낡은 커튼을 힘껏 찢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는데, 그 스케일이 방 하나가 아니라 세상 하나를 찢는 느낌이었다. 뭐지? 설마. 그럴 리가. 손끝에서 시작된 균열이 순식간에 팔뚝만 한 크기로 벌어졌다. 그 안은 새까맸다. 그냥 검은색이 아니라, 뭔가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검음이었다. 마치 우주의 가장 깊은 구석을 손끝에 오려 붙여놓은 것 같았다. 마법 교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니, 하얗다는 표현도 부족했다. 백지장이라는 말이 딱 저럴 때 쓰는 말이구나, 생각할 여유까지 있었다. "도, 도련님! 손을 거두세요!" 나도 거두고 싶었다. 근데 안 됐다. 마력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었는데 잠기지 않는 상황이었다. 배달앱에서 실수로 열 인분을 시켰을 때보다 백 배는 더 당황스러웠다. 아니, 그건 최소한 환불이 되잖아. 이건 환불도 안 되고 취소도 안 됐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아니, 저리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마치 손끝에 전기 콘센트를 직접 꽂아놓은 느낌이었다. 근데 그 느낌이 나쁘지가 않아서 더 무서웠다. 몸이 이 힘을 반기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세포 하나하나가 이 힘의 흐름에 환호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거 완전 몸에 안 좋은 술을 마셨는데 취기가 기분 좋아서 계속 마시게 되는 그런 느낌이잖아. 쿠구구구궁! 연무장 벽 한쪽이 그대로 지워졌다. 부서진 게 아니라 지워졌다. 벽돌도, 창틀도, 그 뒤에 있던 정원수 한 그루까지도 그냥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먼지도, 파편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폭발이라면 최소한 잔해가 남아야 하는데, 이건 그냥 '거기 있던 것'이 '거기 없던 것'으로 편집당한 느낌이었다. 으아 나 이거 죽는 각도인데. 원작 지식이 이 순간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허공>은 존재를 지우는 마법이다. 공간이든 물체든 생명이든, 좌표를 지정하면 그 자리에서 없앤다. 마나 소모가 거의 없어서 사기적으로 강력하고, 그래서 대마교단이 이걸 노린다는 후일담이 게임 설정집 부록에 있었다. 나는 그 부록을 읽으면서 '와, 이거 밸런스 붕괴 스킬이네' 하고 실실 웃었던 기억이 있다. 웃을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밸런스 붕괴 스킬이 내 손끝에서 나가고 있으니까. 지금 알아야 할 건 그게 아니라 이걸 어떻게 멈추냐는 거였다. 설정집 부록엔 발현 초기의 억제법 같은 건 안 적혀 있었다. 그야 각성 시점에서 주인공이 이미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걸로 나오니까. 여덟 살짜리 몸으로 이걸 처음 겪는 상황은 원작에서 다뤄준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 이런 걸 두고 스포일러의 사각지대라고 하나. 나는 이를 악물고 손을 움켜쥐었다. 마력이 팔을 타고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었다. 마치 뼛속에 얼음물을 부어놓은 것 같았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뻐근하게 저려왔고, 눈앞이 핑 돌았다. "멈춰, 멈춰, 제발..." 혼잣말로 애원해봤지만 마법이 내 처절한 심정을 들어줄 리 없었다. 신은 가끔 사람 말을 안 듣는다더니 마법도 똑같았다. 아니, 애초에 이건 신의 소관이 아니라 내 몸의 소관이었으니 더 억울했다. 교사는 뒷걸음질을 치며 뭔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 같았다. 입만 뻐끔거리는 게 마치 물 밖에 나온 붕어 같았다. 그 와중에도 나는 저 표정을 어디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할 정신이 있었다. 아, 게임 컷신에서 NPC들이 재난을 목격할 때 짓던 표정이었다. 실사로 보니 훨씬 더 무섭구나. 쾅! 다행히도, 마력이 어느 순간 스스로 잦아들었다. 균열이 스르르 좁아지다가 완전히 닫혔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들었다. 마치 마라톤을 완주한 다음 편의점에서 산 컵라면 국물까지 다 마신 느낌이었는데, 그 컵라면이 존재째로 지워진 셋트 메뉴였다. 연무장은 반쪼가리가 되어 있었다. 벽 하나, 기둥 두 개, 정원수 세 그루가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남은 잔해도 없었다. 흙바닥에 둥그렇게 파인 구덩이만 남았는데, 그 구덩이의 단면이 소름 끼치도록 매끈했다. 마치 거대한 스푼으로 세상을 퍼낸 것 같았다. 마법 교사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뒤로 넘어갔다. 쿵, 소리가 나는 걸 듣고 나서야 나는 아, 사람이 진짜로 뒤로 넘어가는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인데. [욥기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어디 있었냐면, 지금 저 무너진 벽 앞에서 인생 최대 위기를 맞고 있었지, 뭐. 하나님도 참, 이럴 때 꼭 한 마디씩 하시더라. 소식은 삽시간에 저택 전체로 퍼졌다. 하녀들이 뛰어다니는 발소리, 문이 여닫히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이 저택 여기저기서 울렸다. 나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손이 새하얗게 될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나은은 숨이 넘어가듯 달려와서 내 어깨를 붙잡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내 어깨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네, 저는 괜찮아요. 벽이 좀 안 괜찮네요."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에 나은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 이건 좀 뭉클한데. 이 여자, 나 진짜 자기 목숨보다 아끼는 거 같은데. 여덟 살짜리 도련님 하나 챙기겠다고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사람이 또 있을까. 농담이다. 지금 뭉클할 때가 아니다. 문제는 이 사고가 그냥 개인적인 실수로 넘어갈 수 있는 사고가 아니라는 거였다. 왕국법상 신원 미확인의 고유마법이 발현되면 반드시 마법부에 보고해야 한다. 특히 이렇게 파괴력이 확인된 경우엔 더더욱. 이건 뭐, 동네 놀이터에서 애가 그네 타다가 넘어진 정도가 아니라 놀이터 자체가 지구에서 사라진 수준이니 당연히 신고 대상이었다. 공작가의 시종장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다가왔다. 뒤로는 하녀 몇이 겁먹은 얼굴로 서로 눈치를 보며 서 있었다. "도련님, 이 일은... 반드시 마법부에 보고해야 합니다. 규정입니다." 시종장의 목소리는 격식을 차리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 밑에 깔린 당혹감은 숨길 수가 없었다. 마치 회사에서 대형 사고를 친 신입사원을 상사에게 보고해야 하는 팀장의 목소리 같았다. 아, 이거 완전 회식 자리에서 잔 깨먹은 정도가 아니라 회사 건물 한 층을 통째로 날려먹은 수준이잖아. [사무엘상 17:4, 골리앗이라는 자가 나와서] 골리앗은 아니고, 심판관이 나오겠구나, 이번엔. 나는 무너진 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아서 파멸을 피하겠다는 계획이 첫 발부터 이렇게 폭삭 무너질 줄은 몰랐다. 아니, 벽만 무너진 게 아니라 계획도 같이 무너진 것 같았다. 삼 급 마법인 척 코스프레하겠다는 다짐은, 벽과 기둥과 정원수 세 그루와 함께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다. 시종장은 곧바로 저택 곳곳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녀들은 무너진 자리 주변에 밧줄을 치고, 집사들은 저택 어른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보고할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멀거니 지켜보며, 이게 진짜 현실이구나, 하는 실감을 뒤늦게 곱씹었다. 원작에서 텍스트로만 읽었던 <허공>이, 지금 이 몸의 것이 되어 있었다. 나은은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손을 꼭 붙잡고, 몇 번이나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듯 내 손과 팔을 만졌다. 그 손길이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마치 유리 인형을 만지는 것 같았다. "도련님,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세요? 손끝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괜찮아요, 나은. 진짜로." 나는 웃어 보였다. 사실 몸 안쪽이 텅 빈 것처럼 허했지만, 그걸 말하면 나은이 더 걱정할 게 뻔해서 삼켰다. 사흘 뒤, 저택에 손님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마법부 소속의 심판관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시종장의 얼굴은 사흘 전보다 더 어두웠다.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서은. 원작 게임에서, 역대 최연소 심판관이자 '마법 미치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그 캐릭터였다. 강력한 힘을 가진 미확인 마법을 만나면 무슨 수를 써서든 해부하듯 파헤치고야 마는 인물로, 원작 스토리에서도 몇 번이나 사람 하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던 전례가 있었다. 그 대상이 이번엔 여덟 살짜리 나라는 게, 지금 상황에서 가장 재수 없는 우연이었다. 저택 안은 그날부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하녀들은 발소리조차 조심스럽게 냈고, 시종장은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야윈 것 같았다. 나는 그 서늘한 공기 속에서, 사흘 후 마주하게 될 그 얼굴을 상상하며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켰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