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한서은이 저택 정문을 통과하는 걸 나는 창문 너머로 지켜봤다.
키는 작은데 걸음걸이가 이상하게 빨랐다. 마법부 로브를 걸치고 있었는데, 로브 안쪽에 뭔가 잔뜩 적힌 수첩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걸을 때마다 종잇장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촤락, 촤락.
마치 편의점 폐업 정리 세일 매대에서 영수증 뭉치를 통째로 매달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다만 저 수첩 안에 적힌 게 할인 정보가 아니라 '이상 마법 현상 목격 보고서'라는 게 문제였다.
원작에서 이 캐릭터의 서브 이벤트를 본 적이 있었다. 신기한 마법 현상을 발견하면 밥도 안 먹고 이틀씩 관찰하는 타입. 지금 이 저택에 온 것도 순수한 업무가 아니라 '흥미로운 사고'를 조사하러 온 거라는 게 눈빛만 봐도 느껴졌다.
망했다.
집사가 문을 열어주는 소리,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응접실을 정돈하는 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들려오는 촤락, 촤락 소리. 마치 이 저택 전체가 심판관의 등장을 위한 배경음을 깔아주는 것 같았다.
*
"선우진 도련님이시죠?"
응접실에서 마주 앉자마자 그녀가 물었다. 나이는 열여덟, 나보다 열 살은 많은데 눈빛은 나보다 훨씬 어린애 같았다. 반짝반짝했다. 마치 새로 나온 한정판 굿즈를 손에 넣은 오타쿠의 눈빛이었다.
"네, 심판관님. 이번 일로 폐를 끼쳐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그리고 최대한 작게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겸손 모드 발동이었다. 여덟 살짜리가 죄스러운 얼굴로 사과하면 대부분 어른들은 마음이 풀어진다. 이게 내 필살기였다.
지금까지 이 필살기로 못 넘긴 어른이 없었다. 유모도, 가정교사도, 심지어 처음엔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던 백강호 단장도 이 얼굴 세 번이면 슬쩍 풀어졌다. 그런데.
"그런 건 됐고요."
한서은이 손을 휘휘 저었다. 손사래 치는 동작이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마치 매장 직원이 "이건 세일 상품 아니에요"라고 딱 잘라 말하는 느낌이었다.
"그 마법, 다시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어요?"
어라.
작전 실패다.
여덟 살 인생 처음으로 겸손 모드가 씹혔다. 이건 마치 배달앱에서 리뷰 이벤트로 별점 5개 남겼는데 사장님이 "그건 됐고 진짜 후기 남겨주세요"라고 답 다는 느낌이었다.
"그, 그게 어떻게 발현된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서요. 다시 하려고 해도 될지..."
"괜찮아요, 위험하면 제가 바로 막을 수 있어요. 저 웬만한 대인 방어 마법진은 즉석에서 그릴 수 있거든요. 자, 어서요."
한서은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뭔가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순수한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마치 처음 가본 오마카세집에서 셰프에게 '아까 그 특별 메뉴 하나 더 주세요'라고 조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당장이라도 수첩을 펼치고 관찰 기록을 시작할 태세였다. 로브 안쪽에서 또 다른 수첩 한 권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표지에 큼지막하게 '미확인 고유마법 - 저택 사건 전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전용 수첩까지 만들어 왔다. 이건 정말 취미로 하는 조사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민수기 22:28,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시니]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나귀만도 못한 처지가 됐다는 게 슬프다. 나귀는 최소한 주인이 시켜서 입을 열었지, 나는 자발적으로 입을 다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저, 심판관님. 사실은... 그 마법이 저도 두렵습니다."
나는 최대한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절반은 진짜였다. 진짜로 그 힘이 무서웠다. 존재를 지워버리는 힘이라는 걸 안 이상, 함부로 다시 발현시킬 생각은 없었다.
"제가 통제하지 못하면 또 무언가를 지워버릴지도 몰라요. 이번엔 벽이었지만, 다음엔...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이 말에 한서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순간 진지해지는 게 보였다.
"...그렇긴 하죠. 미확인 고유마법은 통제 실패 시 인명 피해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
그녀가 수첩 하나를 꺼내 뭔가를 빠르게 적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사각사각 들렸다.
사각, 사각.
무슨 내용인지는 안 보였지만 글씨 쓰는 속도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시험 종료 5분 전 답안지 밀어 쓰는 수험생 같았다.
"그럼 오늘은 발현 안 시켜도 돼요. 대신 인터뷰만 좀 할게요. 처음 발현됐을 때 느낌이 어땠어요? 뜨거웠어요, 차가웠어요? 손끝부터 시작됐어요, 아니면 몸통부터?"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최대한 성실하게, 그러나 핵심 정보는 살짝 흐리며 답했다.
"차가웠어요. 손끝부터였고요. 통제가 안 됐어요, 그냥 저도 놀랐어요."
"음, 손끝부터, 차가움... 그렇다면 마나 계열보다는 존재 계열 마법에 가깝겠네요. 혹시 그때 시야가 좁아지거나 소리가 멀어지는 느낌은 없었어요?"
"그, 그런 것도... 조금 있었던 것 같아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문제는 이걸 순순히 다 대답해줄수록 이 여자의 수첩이 두꺼워진다는 거였다.
"흐음."
한서은이 턱을 짚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 시선이 너무 집요해서 나는 순간적으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착각할 뻔했다.
"도련님, 그거 알아요? 지금까지 왕국에 보고된 고유마법 중에 '존재 자체를 지운다'는 계열은 딱 세 개밖에 없어요. 전부 다 이백 년 전 이상 기록이고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그, 그런가요."
"네. 그리고 세 개 다 발현자가 결국 미쳐서 자기 자신을 지웠다는 기록이 남아있어요."
ㄴ...뭐?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침을 삼켰다. 응접실 안 공기가 갑자기 시멘트처럼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는데, 그 평화로운 소리가 지금 상황과 너무 안 맞아서 오히려 더 서늘했다.
세 명 다 미쳐서 스스로를 지웠다니. 이건 뭐 마법계의 3대 흉가 괴담쯤 되는 건가. 근데 그 흉가에 지금 내가 입주하게 된 상황이라는 거고.
한서은이 다시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래서 진짜 신기해요. 지금까지 이런 마법을 여덟 살에 발현하고도 미치지 않은 사람은 없었거든요. 도련님, 특별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특별한 사람이라니. 차라리 특별히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해줬으면 좋겠다.
[전도서 1:9, 새 것이 없나니]
새 것이 없다더니, 이 세계는 없는 것투성이인 모양이다. 이백 년째 새로운 사례가 없다가 갑자기 내가 튀어나왔으니, 이건 마치 단골도 안 오던 폐업 직전 가게에 갑자기 손님이 줄서는 상황이었다. 다만 나는 그 손님을 정중히 돌려보내고 싶었다.
나는 겸손하게 웃어 보이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냥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운이라니. 도련님, 저 그런 애매한 말 별로 안 믿거든요."
한서은이 수첩을 탁 덮었다. 그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나는 어깨를 살짝 움찔했다.
"저 여기 좀 더 자세히 조사해야 할 것 같아요. 상부에 요청할게요. 도련님이 마음에 안 들면 뭐, 어쩔 수 없지만."
마음에 안 들 리가 없나. 절대 마음에 든다고 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상부에 요청이 들어가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조사관이 상주하게 되나? 아니면 왕국 마법부에서 정식으로 감독관이 파견되나? 어느 쪽이든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도 겨우겨우 '평범한 도련님' 컨셉을 유지하는 중인데, 여기에 전문 조사관이 상주하면 그 컨셉이 유지될 리가 없었다.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겸손하고 성실한 도련님 흉내를 내려던 계획이 시작 사흘 만에 마법부 최연소 심판관의 표적이 되는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참고로."
한서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저 이 저택에 며칠 더 머물 예정이에요. 손님방 하나 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며칠 더 머문다고?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이건 뭐 세입자가 계약 연장을 통보하는 것도 아니고, 통보라고 하기엔 너무 당당했다. 심지어 방까지 요구하다니.
"어, 그건... 아버님께 여쭤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미 여쭤봤어요. 허락받았어요."
이미 아버지한테 허락을 받아놨다니. 이 사람, 응접실 들어오기 전에 이미 다 세팅을 해놓은 거였다. 겸손 모드고 뭐고 다 무의미했던 셈이다.
그 순간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진 도련님! 오늘 검술 수련 시간이... 아, 손님이 계셨군요."
검술단장 백강호였다. 예순셋의 노장으로, 검을 오십 년 넘게 잡은 사람 특유의 눈빛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 눈빛이 지금 심판관과 나를 번갈아 보며 뭔가를 재고 있었다.
"백 단장님, 마법부에서 오신 한서은 심판관님이세요."
내가 소개하자 백강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예의는 차렸지만 그 눈빛에서 경계심이 사라지지 않는 게 보였다. 검을 오십 년 잡은 사람 특유의 감이란 게 있는 모양이었다.
"심판관님이시라. 이 저택에 무슨 일로."
"도련님의 고유마법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며칠 머물 예정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한서은이 또 저 초롱초롱한 눈으로 대답했다. 백강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마 검술단장 입장에서도 마법부 인사가 저택에 상주한다는 게 그리 반가운 소식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이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는 게 왠지 불안했다. 백강호는 검을 오십 년 잡은 사람답게 뭔가 이상하면 바로 손이 나가는 타입이고, 한서은은 흥미로운 걸 보면 앞뒤 안 가리고 파고드는 타입이었다. 이 둘이 한 공간에서 만나면 뭔가 사고가 안 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불안은, 다음날 검술 연습장에서 곧바로 현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