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형광등 불빛이 흔들렸다.
키보드 위로 손가락이 멈췄다.
가슴 한복판이 뻐근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모니터 화면이 흐려졌다.
글자들이 뭉개져 보였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소용없었다.
32년.
그게 그의 나이였다.
야근, 그리고 또 야근.
마감, 그리고 또 마감.
책상 위에는 식은 커피 한 잔과 구겨진 영수증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사무실은 조용했다.
다들 퇴근한 시각이었다.
그만 남아 있었다.
늘 그랬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끝이 떨렸다.
심장 어딘가에서 뜨거운 것이 뭉쳐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숨을 쉬려 했지만 목이 막혔다.
'왜 하필 지금.'
그런 생각이 스쳤다.
보고서 마감이 내일이었다.
이 프로젝트만 끝내면, 이번 승진만 하면.
언제나 그런 말을 되풀이했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그는 눈을 감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의식이 끊겼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뿌옜다.
천장이 낮고 하얬다.
시야에 초점이 맞지 않았다.
모든 것이 뭉개진 수채화처럼 번져 보였다.
숨소리가 이상했다.
자기 것이 아닌 듯한, 작고 가느다란 숨소리였다.
공기를 들이켜는 감각조차 낯설었다.
숨 한 번 쉬는 데 이렇게 힘이 드는 줄 몰랐다.
손을 들어보려 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긴 했다.
다만 너무 작았다.
손가락을 하나씩 세어보았다.
다섯 개였다.
당연한 숫자였는데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손은 어른의 손이 아니었다.
살결이 붉고 얇았다.
주먹을 쥐려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려 했지만 목조차 가누지 못했다.
시야는 오직 천장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이 아기가 되었다는 것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쳤다.
죽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이건 어디인가.
질문들이 쌓였지만 답을 낼 방법이 없었다.
울음이 터졌다.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목이 저절로 울렸다.
울음소리는 크고 날카로웠다.
그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몸은 그저 울고 있었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도윤이, 배고파?"
목소리는 부드럽고 낮았다.
따뜻한 손이 그를 안아 올렸다.
익숙하지 않은 온기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편안했다.
도윤.
그것이 그의 새 이름이었다.
낯설게 들렸지만, 앞으로 오래도록 자신을 부를 이름이라는 것을 그는 직감했다.
청하 남작가.
왕국 북쪽 변경의 작은 영지를 다스리는 몰락한 귀족 가문.
도윤이 태어난 곳은 그런 곳이었다.
낡은 성벽.
비 새는 지붕.
곳간엔 밀 한 포대가 겨우 남아 있었다.
귀족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가난한 살림이었다.
성벽의 돌은 군데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비가 오면 지붕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하녀들은 그 밑에 늘 항아리를 받쳐두었다.
겨울이면 벽 틈으로 바람이 새어들었다.
따뜻한 방은 몇 개뿐이었고, 나머지는 냉기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아버지, 태호.
마흔넷의 남작이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었지만 등이 조금 굽어 있었다.
빚 문서를 쥐고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태호는 밤마다 서재에서 촛불을 켜두고 앉아 있었다.
장부를 넘기는 손끝이 늘 무거워 보였다.
가끔은 도윤의 방문 앞을 지나며 잠든 아기를 오래도록 내려다보곤 했다.
그럴 때 그의 눈빛에는 미안함과 기대가 뒤섞여 있었다.
어머니, 서윤.
서른여덟의 안주인이었다.
손끝이 거칠었다.
귀족 부인이라기보다는 밭일하는 아낙 같은 손이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늘 따뜻했다.
서윤은 직접 아이들의 옷을 지었고, 부엌에 나가 하녀들과 함께 빵을 구웠다.
남작 부인이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흉을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손이 거칠어야 밥이 나온다."
그녀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형, 도현.
열일곱의 소년이었다.
검을 쥐면 눈빛이 달라졌다.
순박하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도윤을 보면 늘 웃었다.
도현은 매일 아침 마당에서 목검을 휘둘렀다.
마력이 없다는 사실이 그를 짓누를 법도 했지만, 그는 검술 하나로 자신을 증명하려 했다.
땀에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도윤의 방에 들어와 아기의 뺨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며 웃던 얼굴이 자주 기억에 남았다.
누나, 서은.
열다섯의 소녀였다.
가문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마법사였다.
말투가 차갑고 눈빛이 날카로웠다.
서은은 하루 대부분을 서재에 틀어박혀 마법서를 읽었다.
동생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지만, 도윤이 태어난 뒤로는 종종 아기 침대 옆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마력 이론을 중얼거리곤 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니라, 혼자 되새기는 습관이었다.
도윤은 그렇게 다섯 명의 가족 사이에서 두 번째 삶을 시작했다.
기억은 온전했다.
전생의 회사 이름, 상사의 얼굴, 마지막으로 본 모니터 화면까지.
그런데 몸은 갓 태어난 아기였다.
말을 못 했다.
걷지도 못했다.
생각은 어른인데 몸은 유아였다.
그 간극이 매일 그를 미치게 했다.
배가 고파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울음으로밖에 의사를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어른의 이성으로 갓난아이의 몸을 통제하려 할 때마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때로는 그저 웃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천장을 보고 누워서, 그는 이 세계에 대해 생각했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
마력이라는 것으로 등급을 나누는 세계.
귀족은 대개 강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다.
하녀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조금씩 정보를 모았다.
마력은 다섯 단계로 나뉜다고 했다.
최하위는 무등급, 그다음이 삼류, 이류, 일류, 그리고 최상위 특급.
특급 마력을 가진 이는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힌다고 했다.
그러나 청하 남작가는 예외였다.
대대로 마력이 약했다.
서은이 그나마 봐줄 만한 수준이었고, 도현은 아예 마력이 없었다.
서은의 마력은 삼류 상위 정도로 평가받았다.
그것도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는 나름 자랑거리였다.
도현은 다섯 살 측정 당시 마력이 전혀 감지되지 않아, 검술로 다른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왕도의 귀족들은 청하 가문을 천시했다.
"마법 없는 검사와 삼류 마법사뿐인 집안."
그런 말이 뒤에서 돌았다.
사교 모임에 초청받는 일도 드물었다.
왕도에서 열리는 연회에 초대장이 오면, 서윤은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답장을 보내지 않는 쪽을 택하곤 했다.
자존심의 문제였다.
가지 않으면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영지는 척박했다.
토양이 나빴고, 세금은 늘 부족했다.
인근에는 마물이 자주 출몰했다.
도현이 검을 놓지 못하는 이유였다.
숲 근처 마을에서는 종종 늑대형 마물이 가축을 물어가는 일이 벌어졌다.
그때마다 병력을 부를 여유가 없는 청하 가문은 사병 몇 명과 도현이 직접 나서서 처리해야 했다.
그날 밤이면 도현은 온몸에 상처를 달고 돌아왔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도윤의 방에 들어왔다.
도윤은 세 살이 될 무렵 걷기 시작했다.
처음 걸음을 뗀 날, 서윤은 눈물을 훔치며 손뼉을 쳤다.
태호는 서재 문을 열고 나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용히 미소 지었다.
도현은 도윤을 향해 팔을 벌리고 뛰어오라고 외쳤다.
네 살이 되었을 무렵엔 말도 제법 했다.
처음 뱉은 단어는 "엄마"였다.
서윤은 그 한마디에 며칠을 웃음 짓고 다녔다.
도윤은 속으로 복잡한 감정을 느꼈지만, 그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다섯 살이 된 지금, 그는 이 가문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일을 앞두고 있었다.
마법력 측정.
이 세계에서는 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마법사 협회에서 마력 등급을 측정했다.
측정은 단 한 번, 되돌릴 수 없이 결과가 확정되었다.
측정 방식은 간단했다.
협회의 마법사가 아이의 손목에 특수한 수정을 대고,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색과 강도로 등급을 가늠했다.
빛이 희미하면 무등급이나 삼류, 강렬하고 짙은 색을 띠면 일류 이상이었다.
그 결과는 즉시 협회 기록부에 새겨졌고, 이후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귀족 가문에게는 그 결과가 아이의 미래를 가르는 선이었다.
강한 마력이 나오면 가문의 자랑이 되었다.
약한 마력이 나오면 조용히 묻혔다.
일류 이상의 마력이 나온 아이는 왕도의 마법 학원에 무상으로 입학할 자격을 얻었다.
그런 아이가 있는 가문은 순식간에 사교계의 관심을 받았다.
반대로 삼류 이하가 나오면, 그 아이의 이름은 몇 년 안에 사람들의 입에서 사라졌다.
청하 가문 사람들은 도윤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서윤의 눈빛에서, 태호의 한숨에서 도윤은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저녁 식탁에서 태호는 종종 말없이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윤은 잘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무게가 있었다.
"이번엔 도윤이 형 몫까지 해줄지도 모르지."
도현이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서은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은은 그날 저녁 유난히 오래 서재에 남아 있었다.
등불이 꺼질 때까지 마법서를 넘기던 소리가 도윤의 방까지 들려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 역시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도윤은 그 기대가 무겁게 느껴졌다.
전생에서도 늘 그랬다.
부모의 기대, 회사의 기대, 상사의 기대.
짊어지다가 결국 숨이 멎었다.
이번 삶에서도 같은 무게를 지게 될까.
그는 그것이 두려웠다.
어른의 정신으로 아이의 몸에 갇혀, 또다시 누군가의 바람을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가족을 향한 마음도 분명 존재했다.
서윤의 품, 태호의 무거운 시선, 도현의 웃음, 서은의 무뚝뚝한 관심.
그 모든 것이 낯설지만 싫지 않았다.
그래서 더 복잡했다.
측정을 받는 날 아침, 도윤은 유난히 일찍 눈을 떴다.
창밖으로 회색빛 새벽이 스며들고 있었다.
새들이 낮게 지붕 위를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은 아직 서늘했다.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작은 손으로 침대 난간을 짚고 일어서는 것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마당에는 아직 서리가 남아 있었다.
방문이 열렸다.
서윤이 들어왔다.
"도윤이, 일어났니."
목소리에 평소와 다른 긴장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어른의 눈으로 보면 뻔한 떨림이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이 그를 안아 올렸다.
작은 몸이 어머니의 품에 폭 안겼다.
서윤의 손이 도윤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오늘은 그냥, 평소처럼만 하면 돼."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의 품에 안긴 팔에는 미묘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도윤은 그 힘을 느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식탁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정성이 들어간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빵과 수프, 그리고 귀한 우유 한 잔.
도현은 평소처럼 웃으며 도윤의 옆에 앉았지만, 눈빛에는 미세한 긴장이 배어 있었다.
서은은 식탁 끝에서 조용히 스프를 뜨고 있었다.
태호는 식사 도중 몇 번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모두가 오늘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식탁 위의 침묵이 평소보다 길었다.
식사를 마친 뒤,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하인의 전언이 들려왔다.
서윤이 도윤에게 깨끗한 옷을 입혔다.
작은 단추 하나하나를 채우는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도윤은 그 떨림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났다.
도윤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낮은 지붕들, 마른 논밭, 그리고 저 멀리 협회 건물의 첨탑이 보였다.
마차 안에는 서윤과 태호가 함께 타고 있었다.
도현과 서은은 마차 뒤를 따라 말을 타고 왔다.
바깥 풍경이 서서히 낯익은 영지의 경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을을 지나칠 때, 몇몇 주민들이 마차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호기심과 동정이 섞여 있었다.
"오늘이 그 집 막내 측정하는 날이라던데."
스쳐 지나가는 목소리가 도윤의 귓가에 닿았다.
도윤은 무릎 위에 놓인 자신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이런 순간이 낯설었다.
회사의 평가, 상사의 판단, 그런 것들과는 전혀 다른 무게였다.
이번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그 무언가가 자신을 시험하려 하고 있었다.
그 첨탑을 보는 순간, 도윤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첨탑은 회색 돌로 지어져 있었다.
그 끝에는 알 수 없는 금속 장식이 아침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마차가 가까워질수록 그 반짝임이 점점 선명해졌다.
무언가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