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대가는 오른발 하나였다

3화

예지몽 속의 화재는 그저 시작이었을 뿐, 하은의 실체가 소문과 다르다는 사실을 서연은 그날 이후 조금씩 실감하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하은은 여전히 순진한 성녀였다. 학원에서는 평민 출신답게 겸손하고 예의 발랐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았다. 하녀들도 하은을 두고 "저렇게 마음씨 착한 분은 처음 봤다"며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문제는 그 평판이 오직 서연 앞에서만 완전히 다른 얼굴로 바뀐다는 점이었다. '다들 저 아이의 절반만 보고 있는 거야.' 서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나머지 절반을, 자신만 보고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불안하게 다가왔다. "선우현 왕자님께서 아가씨께 다과를 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최덕수가 보고하듯 전했을 때, 서연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최덕수는 눈치가 빠른 시종이었다. 그래서 이런 사소한 소식도 놓치지 않고 물어오는 게 그의 특기였다. "그래서?" "그런데 그 다과회가……" 최덕수가 말을 멈췄다.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술술 말을 이어가던 사람이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취소됐습니다. 왕자님 측에서 갑자기 사정이 생겼다고요." "사정? 무슨 사정인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최덕수가 목소리를 낮췄다. "왕자님 쪽 시종들이 요즘 다들 좀 이상해졌습니다. 표정도 안 좋고, 서로 눈치만 보고요." 서연은 그 말을 별생각 없이 넘겼다. 시종들 사이의 알력 다툼이야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날 저녁, 우연히 마주친 시녀 하나가 조심스레 흘린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성녀님이 왕자님 쪽 시종한테 잠깐 뭐라고 하시는 걸 봤는데……" 시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복도 저편을 두 번이나 살피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뭐라고 했는데?" "그건 잘 안 들렸는데, 분위기가……" 시녀가 몸을 떨었다. "그냥 무서웠어요. 성녀님이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건 처음 봤거든요." "시종은 어떻게 됐어?" "시종이 갑자기 새파랗게 질려서 뛰어가더라고요. 다과회 준비하던 물건들도 그대로 두고요." 시녀가 두 손을 모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성녀님은 그 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한테 웃으면서 인사하시더라고요." 서연은 그 대비가 이상하게 신경에 걸렸다. 겁에 질려 도망친 시종과, 아무렇지 않게 웃는 하은. 그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 *** 서연은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다과회가 취소된 다음 날, 서연은 일부러 선우현과 마주칠 자리를 만들었다. 도서관 앞, 사람이 많지 않은 시간대였다. 서연은 일부러 책 몇 권을 골라 팔에 안고, 마치 우연히 지나가는 것처럼 걸음을 늦췄다. "영애." 선우현이 서연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정략혼약자로 예정되어 있던 사이였지만, 요즘은 그 관계마저 어색해진 지 오래였다. 서연이 보기에 선우현은 늘 예의 바르고 흠잡을 데 없는 왕자였는데, 오늘은 어딘가 낯빛이 좋지 않았다. "다과회가 취소됐다고 들었는데." 서연이 운을 뗐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선우현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그 표정이 서연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마치 건드려서는 안 될 걸 건드린 사람처럼. "……별일 아닙니다." 선우현이 시선을 피했다. 왕자답지 않은 태도였다. 원래 이 남자는 어떤 질문에도 여유 있게 웃으며 답하는 게 특기였는데, 지금은 그 여유가 온데간데없었다. "별일 아닌데 그런 얼굴을 해?" 서연이 한 걸음 다가섰다. "말해봐. 나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선우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백하은 양이 제 시종에게 그러더군요. '영애님과 두 번 다시 다과를 하실 생각은 안 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러면서 손끝에서……" 선우현이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에서 뭐?" 서연이 재촉했다. "빛이 났습니다. 그냥 빛이 아니었어요." 선우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안에 검은 게 섞여 있었습니다. 제 시종 말로는, 그 빛을 보는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더군요." 서연은 순간 숨을 멈췄다. "확실해? 잘못 본 거 아니고?"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종의 얼굴이……" 선우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얼굴은 꾸며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 빛과 어둠이 뒤섞인 마력. 서연이 알고 있던 원작 속 성녀는 순백의 신성력만 다루는 존재였다. 어둠이 섞인 성녀 같은 설정은, 서연의 기억 어디에도 없었다. '뭐가 잘못됐다는 게 이 정도였다니.' 서연은 그날 밤 방으로 돌아와 촛불 아래 오래 앉아 있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비친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했지만, 서연은 그 흔들림조차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원작의 흐름을 뒤집은 대가로, 자신은 뭔가 예상하지 못한 존재를 깨워버린 걸지도 몰랐다. 순수한 신성력만 지녔어야 할 성녀가, 지금은 마력의 절반 이상을 알 수 없는 검은 힘으로 채우고 있었다. '내가 원작에서 벗어난 만큼, 저 아이도 원작에서 벗어난 걸까.' 서연은 손끝으로 촛대를 매만지며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가, 어째서 하은의 힘을 이렇게 뒤틀어버렸는지. 그 힘의 방향이 온전히 자신을 향해 있다는 사실이, 서연에게는 가장 두려운 부분이었다. "영애님." 방문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은이었다. 매일 밤 그렇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조차 나긋했다. 서연은 촛불을 끄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문이 열리는 소리, 그리고 익숙한 걸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마저 어쩐지 부드러웠다. "오늘도 오셨네요." 서연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영애님이 걱정돼서요." 하은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선우현 왕자한테 무슨 얘기 했어?" 서연이 눈을 뜨며 물었다. 최대한 담담하게 물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하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이번엔 유리처럼 투명하지 않았다. "별거 아니에요." 하은이 서연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손끝에서 미세한 온기와 함께, 뭔가 낯선 기운이 스쳤다. "그냥, 아무도 영애님한테 가까이 못 오게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왜?" 서연이 물었다. 대답을 알고 싶으면서도, 알고 싶지 않았다. "왜냐고요?" 하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빛만은 선명했다. "영애님은 저만 봐주셔야 하니까요." 서연은 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감추지 못했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이 아이는 대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변한 걸까.' 하은의 손끝에서 스쳤던 그 낯선 기운이, 손을 놓은 뒤에도 오래도록 서연의 손등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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