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상자 뚜껑을 열어보기도 전에, 최덕수가 뒷걸음질을 쳤다.
"아가씨, 이건 건드리지 않는 게……"
"이미 건드렸어." 서연이 지팡이를 짚은 채 상자 앞으로 다가섰다. 상자는 손바닥만 한 크기였고, 표면에는 문양과 똑같은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나무는 오래되어 색이 거의 빠져 있었는데, 그 위에 새겨진 문양만은 이상하게도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 매일같이 손끝으로 문질러 닦아낸 것처럼.
'관리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잖아.' 서연은 그 생각을 하며 상자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최덕수는 여전히 두 걸음 뒤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마치 폭탄 해체 현장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창백했다.
뚜껑을 열자 안에는 낡은 양피지 한 장뿐이었다. 서연이 조심스레 펼쳐 보니, 오래된 글씨체로 짧은 기록이 적혀 있었다.
'백 년 전, 빛과 어둠을 동시에 타고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사랑하는 이를 지키려다 세상의 절반을 지웠다. 이후 이 가문은 그런 존재가 다시 나타난다면, 반드시 가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서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글씨는 흘림체였고, 몇몇 글자는 세월에 삭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저 문장만큼은 이상하게 또렷하게 읽혔다. 마치 종이가 그 부분만은 절대 지워지지 않게 만들어진 것 같았다.
'백 년 전에도 이런 게 있었다고?' 소설 속에도, 예지몽 속에도 없던 정보였다. 즉 이건 서연이 알던 원작의 범위를 완전히 벗어난 이야기였다.
서연은 양피지를 다시 한번 읽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읽었다.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 세상의 절반을 지웠다는 표현이, 대체 물리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최덕수, 이 가문에 이런 사례가 또 있었어?"
최덕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얬다.
"저는……"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선대 가령이었던 제 아버지께 딱 한 번 들었습니다.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말하는 순간, 그 존재가 다시 온다고 믿으셨으니까요."
"그거 완전히 미신이잖아." 서연이 반사적으로 내뱉었다가, 곧 자신의 말을 다시 삼켰다. 이 세계에서는 미신이라고 치부했던 것들이 번번이 현실로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최덕수는 그런 서연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시선이 자꾸 초상화 쪽으로, 그리고 상자 쪽으로 옮겨 다녔다. 마치 둘 중 어느 것도 오래 쳐다볼 수 없다는 듯이.
***
서연은 양피지를 다시 상자에 넣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먹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빛이 초상화의 절반만을 비추고 있어서, 그림 속 인물의 얼굴이 반은 밝고 반은 완전히 어둠에 잠긴 채였다.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상징적인 배치였다.
이곳이 하은을 격리할 은신처가 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은 하은의 힘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실마리에 더 가까웠다.
'백 년 전의 존재와 하은이 관련이 있다면.' 서연은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이건 단순한 성녀의 각성이 아니야. 뭔가 더 오래된 문제야.'
문제는, 그 오래된 문제의 결말이 이미 양피지에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가두라는 유언. 서연은 그 두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속이 서늘해졌다. 하은을 가둔다는 상상 자체가, 지금의 자신에게는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곳을 비밀리에 정리하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서연이 최덕수에게 지시했다.
"성녀님을 이곳으로 데려오실 생각이십니까?"
"당장은 아니야. 먼저 알아볼 게 남았어."
최덕수는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고 답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서연의 계획 자체를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백 년 묵은 유언을 상대로 대체 무엇을 알아볼 수 있다는 건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었을 것이다.
서연은 방을 나서며 초상화를 다시 한번 돌아봤다. 금빛과 칠흑, 두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시선을 피하듯 서연은 서둘러 문을 닫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별채 안에 울렸다.
***
그날 밤, 서연은 저택으로 돌아와 침실 문을 열었다.
몸은 피곤했고 머릿속은 그보다 더 복잡했다. 양피지에 적힌 문장들이 계속 눈앞에서 맴돌았다. 세상의 절반을 지웠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걸으면서도 곱씹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미 하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연은 순간 숨을 삼켰다. 침대 옆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는 하은의 모습이, 낮에 본 초상화의 잔상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은의 눈동자는 평범한 갈색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것마저 의심스럽게 느껴졌다.
"오늘은 어디 다녀오셨어요?" 하은이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나긋했지만, 눈빛에는 처음 보는 종류의 예민함이 섞여 있었다.
"별채 정리 좀 했어." 서연이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별채요?" 하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택 뒤편의 그 낡은 건물 말씀이시죠?"
순간 서연의 몸이 굳었다. 그 건물의 존재를 아무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데, 하은은 이미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온갖 가능성이 빠르게 지나갔다. 최덕수가 말했을까. 아니, 최덕수는 오늘 하루 종일 서연과 함께 있었다. 다른 하인이 봤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별채는 애초에 저택 사람들도 잘 모르는 위치에 있었다.
"……거기가 있는 걸 어떻게 알아?" 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은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지나치게 길었다. 서연은 그 몇 초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그날 도서관 앞에서 선우현이 말했던 표정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냥, 왠지 느껴졌어요." 하은이 서연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영애님이 뭔가 숨기려고 할 때마다, 저는 항상 먼저 알게 되더라고요."
그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그런데 그 부드러움이 이제는 조금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하은은 그만큼 다시 다가왔다.
서연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한기로 먼저 깨달았다.
이 관계는, 이미 서연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