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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본 화면은 엔딩 크레딧이었다. '칠영웅전설 II' 최단시간 클리어 — 서버 전체 랭킹 1위, 플레이 타임 187시간 22분, 그리고 그 밑에 조그맣게 떠 있던 문구 하나. [히든 콘텐츠가 발견되었습니다. 특별 DLC '전생자의 방'을 실행하시겠습니까?] 나는 별생각 없이 예를 눌렀는데, 그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3년을 쏟아부은 게임의 진짜 결말을 본 직후였고, 아직도 손끝에 열이 남아 있었으니까, 뭐가 나오든 일단 보고 싶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날은 밤새 과제에 매달리다가 새벽 세 시에 겨우 클리어한 참이었고, 다음 날 수업이 걸려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버튼 하나를 누르는 데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이 내 인생 마지막 선택이었다는 걸, 그때는 당연히 몰랐다. 화면이 새하얗게 번쩍였고, 뭔가 몸이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있었는데... 그 감각을 굳이 설명하자면, 변기 물이 내려갈 때 나도 같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몸의 감각이 위에서 아래로, 발끝부터 뽑혀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우습게도 그 순간에도 나는 이게 무슨 특수 이펙트인지 분석하고 있었다. 렉이 걸린 건가, 그래픽 카드 문제인가, 하는 식으로. 게임 폐인의 말로였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곧바로 알아챘다. 눈이 잘 안 떠졌고, 팔다리가 내 것 같지 않았고, 세상이 지나치게 컸다. 천장의 나무 무늬가 낯설게 크게 보였는데, 그건 방이 큰 게 아니라 내가 작아졌기 때문이었다. 손을 들어보려 했는데, 그 손이라는 게 내가 알던 손보다 훨씬 짧고 뭉툭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접히는 방식조차 어색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정확히 3초가 걸렸다. 요컨대, 나는 아기였다. "응애...?" 하고 소리를 내보려 했는데, 실제로 나온 건 그냥 응애, 그것뿐이었다. 목소리조차 내 것이 아니었다. 성대의 울림부터가 낯설었고, 발음을 만들어내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뇌는 성인의 사고를 하고 있는데 몸은 갓 태어난 신생아라는 이 괴리가, 나는 그제야 실감이 났다. 당황할 틈도 없이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는데, 그 익숙한 프레임을 보고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게임에서 수천 번은 봤을 UI였다. 파란 테두리에 하얀 배경, 모서리에 작게 박힌 제국 문양까지, 어디 하나 틀린 곳이 없었다. [대상 : 강도훈] [가문 : 가온제국 강씨 가문 장남] [특이사항 : 히든 시나리오 - '최종 흑막' 루트 적용] [예정된 결말 : 15년 후, 성녀 암살 및 반란 주도 → 황제에 의한 처형] ...그 순간 나는 온 몸의 피가 다 식는 기분이었다. 강도훈이라는 이름이 왜 이렇게 익숙한지, 나는 뇌를 뒤져볼 필요도 없었다. 그건 '칠영웅전설 II'에서 진 엔딩을 보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최종 보스의 이름이었으니까. 게임 후반부, 성녀를 암살하고 학술원장을 죽인 뒤 반란군을 일으켜 제국 전체를 불태우는 남자. 주인공 박선우의 옛 친우였다가 배신자가 되는 그 캐릭터. 공략 게시판에서 몇 번이고 언급되던 이름, 최종 던전 보스 러시의 마지막 관문, 클리어 타임 어택을 할 때마다 나를 몇 번이나 죽였던 그 지긋지긋한 검사.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나는 죽어서 게임 속 세계로 전생했는데, 하필 그 몸이 최종 보스의 몸이라는 뜻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개사긴데? 웃기게도, 화가 나기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러면 이도윤이 아니라 강도훈인 건가' 하는 언어유희적인 잡생각이었다. 도윤이었다가 도훈이 된 셈이니, 이름 한 글자만 바뀐 강제 개명이랄까. 성까지 이씨에서 강씨로 바뀌었으니 이건 뭐 개명치고는 너무 급진적이지 않나 싶기도 했고. 나는 그 와중에도 그런 실없는 농담이나 하고 있는 내가 어이없어서 픽 웃었는데, 물론 아기의 몸으로는 그것도 그냥 응애 소리로만 나왔다. 감정과 표정 근육이 따로 노는 이 느낌은, 마치 컨트롤러 입력이 화면에 반영되기까지 시간차가 있는 그런 렉 걸린 게임을 하는 기분과 비슷했다. 웃음이 잦아들자, 진짜 문제가 뒤늦게 밀려왔다. 게임 지식에 따르면 강도훈은 15년 후, 성녀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킨 죄로 황제 앞에서 처형당한다. 목이 잘리는 엔딩 컷신을 나는 세 번이나 돌려본 적이 있었다. 처음엔 스토리가 궁금해서, 두 번째는 연출이 아까워서, 세 번째는 뭔가 놓친 게 있나 싶어서. 그런데 그게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말 그대로 시한부였다. 병으로 죽는 시한부도 아니고, 태어난 순간부터 스토리 라인에 정해진 사망 시점이 박혀 있는, 그런 종류의 시한부였다. 병원에서 통보받는 시한부는 그래도 오차가 있다지만, 이건 게임 시나리오라는 게 문제였다. 시나리오는 어긋나는 법이 거의 없었고, 어긋나더라도 그건 유저가 개입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몸은 유저가 아니라 그 시나리오 속 캐릭터 그 자체였다. [남은 시간까지 확인하시겠습니까?] 그 문구를 보자마자 나는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확인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계산이었다. 정확한 사망 날짜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곱씹어봐야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 계산과 별개로, 손가락 하나 제대로 못 움직이는 상태에서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만은 선명했다. 모래주머니를 온몸에 매단 듯한 무거움이 아니라, 오히려 몸속에 있던 뭔가가 통째로 빠져나간 듯한 허전함이었다. 마치 배터리가 방전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뭔가는 분명히 여기 있는데 작동하지 않는다는 그 무력한 느낌.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아기 특유의 흐릿한 시야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요는, 15년 후에 정해진 파멸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녀를 죽이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단순한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게임을 187시간이나 파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런 류의 서사는 절대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시나리오라는 건 대개 하나의 분기점만 막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원인을 없애면 다른 원인이 자라나고, 결과를 막으면 다른 경로로 같은 결과가 도출된다. 그게 스토리 작가들의 흔한 수법이었고, 나는 그 수법에 몇 번이나 낚였던 플레이어였다. 더 큰 문제는, 강도훈이 왜 그런 짓을 벌이는지 게임 내에서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스토리 후반, 갑작스레 돌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그의 행적은 팬들 사이에서도 논쟁거리였다. 누군가는 세뇌라고 했고, 누군가는 원래부터 야심가였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성녀와의 관계에서 뭔가 배신을 당했을 거라는 추측도 내놓았는데, 정작 공식 설정집에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적혀 있지 않았다. 개발사가 후속작을 위해 일부러 여지를 남겨둔 거라는 소리도 있었지만, 후속작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 어느 쪽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확신할 수 없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내 목숨과 직결되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으에엥..." 생각이 복잡해지니까 몸이 먼저 반응했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울음을 터뜨렸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기의 몸은 아기의 감정을 따라가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으로는 15년 후의 처형 장면을 떠올리며 냉정하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는데, 몸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이 그냥 배가 고프고 낯설고 무섭다는 신호를 있는 그대로 터뜨리고 있었다. 이성과 육체가 완전히 분리된 채로 각자 따로 움직이는 이 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울음소리에 반응해서, 방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 우리 도훈이 배고픈가 보네."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는데, 다급하면서도 다정한 그 어조에서 나는 이 사람이 내 생모라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강미래. 게임 설정집에서 딱 한 줄 언급됐던 이름이 눈앞에서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설정집에는 그저 '강도훈의 모친, 병으로 일찍 사망'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들어오는 그녀는 그런 한 줄짜리 정보와는 전혀 다른, 살아 숨 쉬는 사람이었다. 걸음걸이는 급했지만 목소리는 안정되어 있었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팔의 각도에는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 그녀가 나를 안아 올리는 순간, 나는 그 품에서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는데, 그건 아마 이 상황이 아무리 황당해도 최소한 지금 이 순간에는 나를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품에 안기니 온도가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사람의 체온이라는 게 이렇게 크게 느껴지는 건, 아마 이 작은 몸뚱이가 아직 스스로 체온을 유지하는 데도 벅차기 때문이겠지, 하고 나는 또 쓸데없는 분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은 딱 그 정도까지였다. 강미래의 등 뒤로, 문설주에 걸쳐진 검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낡았지만 손잡이가 유독 반질반질하게 닳아 있는 그 검이, 나는 왠지 낯설지 않았다. 게임 초반부 삽화에서 강씨 가문의 상징으로 그려졌던 바로 그 검이었다. 칼날이 검은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건 단순한 무기의 색이 아니라, 뭔가를 삼키고 있는 듯한 색이었다. 게임 내에서 그 검은 강도훈이 반란을 일으킬 때 손에 쥐고 있던 무기이기도 했다. 최종 보스전 인트로 컷신에서, 저 검이 붉게 물들며 화면 전체를 뒤덮던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재생됐다. 그 순간, 시야 한켠에 새로운 문구가 조용히 떠올랐다. [특수 스킬 '마검 소환'의 봉인 조건이 감지되었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고서야, 이게 예삿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봉인 조건이라는 게 있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그 봉인이 언젠가는 풀린다는 뜻이었고, 그 봉인이 풀리는 순간이 아마도 15년 후, 게임에서 봤던 그 파국의 시작점과 맞물려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아직 제대로 자라지도 않은 이 작은 뇌 속에서 차갑게 번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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