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이씨(李氏) 가문의 대문을 넘어설 때, 나를 맞이한 건 환영의 인사가 아니라 수군거림이었다.
"저게 그 천재라던 애냐?"
"천재는 무슨, 이제 껍데기만 남았다더라."
"쯔쯔, 단전이 아예 박살났다던데."
마당을 지나며 내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겨우 몇 달 전만 해도 나를 자랑스러워하던 사람들이었다. 이장혁(李長赫)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 나오면 다들 허리를 굽혔었는데, 지금은 개 지나가듯 곁눈질하며 침을 뱉는다. '그래, 잘 있다가 잘 갔구나 인심이란 것도.'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웃을 힘도 없는데 자꾸 웃음이 나오는 게 더 서글펐다.
그런 시선들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연아(蓮兒)였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종녀(從女)인 그녀는 내가 대문을 넘는 순간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 나와 내 팔을 붙잡았다.
"장혁 오라버니!"
눈물이 그녀의 눈가에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운데도 내 팔을 놓지 않았다.
"울지 마, 나 아직 살아 있잖아."
"그게 더 서러워서 우는 거예요, 오라버니..."
나는 그 말에 뭐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살아 있는 게 서럽다니. 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살아 있는 채로 이렇게 취급받는 게, 어쩌면 죽는 것보다 더 지독한 벌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날부터 나는 가문 별채의 구석방에서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방치되었다. 처음 며칠은 그나마 사람들이 문안이랍시고 들락거렸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문제는 요양이 끝나갈 무렵부터였다. 무술 교관(武術敎官) 이호(李虎)가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다. 처음엔 훈련을 재개하라는 명목이었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그의 말투가 바뀌었다.
"이 폐인 새끼가 밥값도 못 하면서 방에 처박혀 있어?"
나는 대꾸할 힘도 없어 고개만 돌렸다. 예전에는 이 새끼가 나 보고 사부님 사부님 하면서 알랑거리던 놈이었는데. '세상 참 빨리 변하네, 씨발.'
"어른이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해?"
이호가 내 어깨를 발로 밀었다. 나는 뒤로 넘어졌다. 바닥에 손을 짚고 다시 일어나려는데, 그의 발이 다시 내 등을 짓눌렀다.
빠득.
허리에서 소리가 났는지 착각인지도 모르겠다. '아, 이 씹쌔끼, 이제는 이런 것들까지 나를 밟네...' 나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소리를 내면 더 재밌어할 게 뻔했다. 저런 인간들은 상대가 아파하는 걸 보고 즐기니까, 즐길 이유를 주지 않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오라버니한테 왜 이러세요!"
연아가 마당에서 뛰어와 이호의 다리를 붙잡았다. 작은 몸으로 어른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리는 꼴이, 지금 생각해도 우습고도 처절했다.
"어린 게 뭘 안다고 끼어들어."
이호가 그녀를 밀쳐냈다. 연아가 마당 바닥에 쓸리듯 넘어졌다.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뭔가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었다. '이대로 계속 당하고만 있을 거냐, 이장혁...' 하지만 몸은 마음을 따라가지 못했다. 단전이 텅 비어 있었으니까. 기운을 끌어올리려 해도 뱃속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내 몸이 나를 배신하고 도망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호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 눈빛, 여전하네. 근데 눈빛만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지, 안 그래?"
그는 발을 툭 털며 방을 나갔다.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두고 봐라, 이 새끼야.' 하지만 그 말조차 지금은 헛소리에 불과했다.
그날 밤, 연아는 몰래 죽 한 그릇을 들고 내 방으로 찾아왔다.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는,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안으로 들어왔다.
"오라버니, 이거라도 드세요."
나는 그녀의 손이 부르튼 걸 보았다. 마당 일과 부엌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나를 챙기느라 밤늦게까지 움직인 흔적이었다. 손등에 갈라진 자국이 몇 개나 있었다.
"너까지 힘들게 하고 싶지 않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오라버니 곁에 있는 게 힘든 게 아니에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죽 그릇을 내 손에 쥐여주고도 한참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촛불 아래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 아이만큼은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위로가 되었는지, 더 서글퍼졌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온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대관사(代管事) 이산(李山)이 별채로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죽 그릇을 쥐고 있던 내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