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버려졌는데 절대고수라니

4화

이산(李山)은 이씨 가문의 살림을 도맡는 대관사였다. 문서 뭉치를 옆구리에 낀 채 별채로 들어선 그의 표정은 조문객보다 더 차가웠다. 발걸음 소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또각, 또각. 마치 관 뚜껑에 못 박는 소리처럼 규칙적이고 무심했다. "장혁 도련님." 그는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마치 비웃음처럼 흘렸다. 그 세 글자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마다 나는 이가 갈렸다. '도련님, 좋아하시네. 폐인 도련님이라고 하지 그러냐.' "이제부터 도련님 명의로 되어 있던 적립금(積立金)은 가문이 대신 관리하기로 했습니다." "...뭐라고요?" 나는 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상체가 휘청거렸다. 그 적립금은 어머니가 내가 문파에 입문할 때 남겨준, 유일하게 내 몫이라 부를 수 있는 재산이었다. 그것마저 빼앗기면 나는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도장(圖章)이나 찍으세요. 어차피 폐인이 된 몸으로 돈 관리할 처지도 아니시잖습니까." 이산이 문서를 내 앞에 들이밀며 웃었다.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여유로웠다. 마치 이미 다 정해진 일이라는 듯, 내 대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 개새끼도, 이 틈에 한몫 챙기겠다는 거구나...' 이런 놈들은 어디서 이렇게 잘 배워오는 건지. 사람이 쓰러지면 부축해주는 게 아니라 주머니부터 터는 게 이 가문의 가풍인가 싶었다. 나는 손을 뻗어 문서를 밀어냈다. "싫습니다." "싫으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도련님은 이 가문에서 발언권이 없으시니까요." 그는 마치 어린애 떼쓰는 걸 받아주듯 한숨을 내쉬더니, 내 손을 억지로 끌어와 도장을 찍게 했다. 힘이 없는 팔은 저항조차 되지 못했다. 붓을 든 손목을 잡아채는 그 손길에 나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뿌드득. 이가 절로 갈렸다. 서류에 붉은 인영(印影)이 남는 순간, 나는 마지막 남은 것까지 빼앗겼다는 걸 실감했다. 이산은 도장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문서를 챙겨 넣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도련님." 그 인사조차 조롱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의 유품인 낡은 옥패(玉牌)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옥패 표면은 세월에 닳아 반질반질했고, 가장자리에는 작은 균열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가 늘 목에 걸고 다니던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열두 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그보다 더 오래전에, 변방의 전투에서 돌아오지 못했다고 들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웃는 얼굴만 겨우 어렴풋이 남은 어머니. 남은 건 이 가문뿐이었는데, 이제 그 가문마저 나를 벗겨먹으려 들었다. '씨발, 진짜 아무도 남지 않았구나.'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삼키다 못해 목구멍이 아팠다. 이렇게 누워서 옥패 하나 붙잡고 우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연아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옥패를 함께 들여다봤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옆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러워 보였다. "오라버니 어머니, 참 좋은 분이셨다고 들었어요." "...너는 기억도 못 하잖아." "저희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녀가 웃었다. 그 웃음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웃는 낯을 보는 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순간 코끝이 시큰거렸다. "오라버니, 저는 오라버니가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정말 싫어요."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살짝 감쌌다. 부르튼 손끝의 온기가 낯설면서도 따뜻했다. 그 손을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뿌리칠 힘도 없었다. "이산 어른이 다녀갔다는 얘기, 들었어요. 그런 사람들 말, 다 믿지 마세요. 오라버니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목소리를 붙잡듯 눈을 감았다. 나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다짐했다. '이대로 끝나지 않아. 반드시 되찾을 거다.' 그 다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는, 다음 날 이호가 다시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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