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던전의 마지막 층은 조용했다.
돌벽 틈으로 새어드는 인광이 파랗게 흔들렸다. 그 빛은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이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이도현은 검을 거두고 등 뒤를 살폈다. 파티원들의 숨소리가 하나씩 가라앉고 있었다. 방금까지 몬스터를 상대하며 거칠어졌던 호흡들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바닥에는 부서진 뼈 조각과 먼지가 흩어져 있었다. 오래된 던전 특유의 냄새, 습기와 곰팡이와 죽은 것들의 흔적이 코끝을 스쳤다. 익숙한 냄새였다. 이런 냄새는 셀 수 없이 맡아왔다.
서윤재가 손을 들었다.
"묵린."
대답은 없었다.
서윤재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다시 손끝을 들어 허공을 그었다. 손끝에서 옅은 빛이 스며 나왔다가 사라졌다.
"묵린, 앞을 밝혀라."
한 박자가 늦었다.
천장 어딘가에서 거대한 몸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비늘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낮고 무거운 진동이 발밑까지 전해졌다. 돌가루가 위에서 흩날려 내려왔다. 그리고 나서야 빛이 켜졌다. 파란 불꽃이 허공에서 피어올라 통로를 밝혔다.
서윤재는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신입 파티원 중 하나가 그 불꽃을 올려다보며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진짜 드래곤을 부리는 거예요?"
"보다시피."
서윤재의 대답은 짧았다. 신입은 더 묻지 않았다.
이도현만이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가 아는 묵린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이미 움직이는 존재였다. 생각이 닿기도 전에 반응하는 존재였다. 도현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처음 파티에 합류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묵린은 단 한 번도 반응이 늦은 적이 없었다. 서윤재가 손끝을 들기도 전에 이미 빛이 켜져 있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반응이 늦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도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숨을 한 번 짧게 들이켰다.
뒤에서 누군가 어깨를 두드렸다. 박지호였다.
"뭐 해. 안 가?"
"어, 가."
도현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눈은 자꾸 위를 향했다. 천장 너머, 어둠 속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거대한 형체를 향해서. 발걸음이 자꾸 느려졌다. 박지호가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뭘 그렇게 봐."
"아니, 아무것도."
"너 요즘 이상해."
"내가?"
"묵린 쳐다보는 눈빛이 꼭 뭐 찾는 사람 같아."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통로를 걷는 발소리만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좁은 길을 지나 계단을 오를 때마다 위에서 다시 그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무언가가 숨을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캠프로 돌아온 것은 해가 완전히 저문 뒤였다.
모닥불이 타올랐다. 나무 냄새와 탄 고기 냄새가 섞였다. 불꽃이 튀는 소리, 장작이 갈라지는 소리가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렸다. 파티원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윤재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늘 그렇듯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 앉아 있었다. 이번에도 전부 여자였다.
세 명이었다. 한 명은 검을 손질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서윤재의 지도를 곁눈질로 살피고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조용히 불꽃만 바라보고 있었다.
정민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또 셋이나 새로 들어왔네."
"그러네."
박지호가 짧게 대답했다. 그는 고기를 뒤집으며 대답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상하지 않아? 지난달에도 셋, 그전에도 넷. 전부 여자만."
"실력만 보고 뽑는 거겠지."
"실력만 보고?"
정민우가 목소리를 낮췄다.
"내가 본 애들 중에 실력 없는 애도 있었어. 그런데 뽑혔어."
박지호는 고기를 다 뒤집고 나서야 대답했다.
"그럼 뭐, 딴 이유가 있다는 거야?"
"몰라. 그냥 이상하다고."
정민우가 도현을 돌아보았다.
"넌 어떻게 생각해?"
도현은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이 없었다. 불꽃이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야, 도현아."
"응."
"묵린 말이야. 아까 좀 이상하지 않았어?"
도현의 시선이 그제야 움직였다.
"너도 봤어?"
"봤지. 반응이 늦었잖아. 그런 적 없었잖아, 원래."
박지호가 끼어들었다.
"기분 탓 아니야? 며칠 던전 돌아서 다들 피곤한 거지."
"드래곤이 피곤하다고?"
정민우의 말에 박지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고기에 시선을 돌렸다. 불편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생각해보면,"
정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묵린이 원래 이렇게 조용한 애였나? 예전엔 서윤재 형이 명령 내리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잖아."
"기억력 좋네."
"당연하지. 몇 년을 같이 다녔는데."
박지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드래곤도 컨디션이 있을 수 있지."
"컨디션이 있는 드래곤이라니, 그건 또 새롭네."
정민우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슬쩍 서윤재 쪽을 향했다. 서윤재는 여전히 지도에 몰두한 것처럼 보였다. 신입들과 몇 마디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낮은 목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였다.
도현은 다시 불꽃을 바라보았다.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뭔가 달라지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그 감각은 손끝에서부터 시작해 서서히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하나둘 자리를 떴다. 신입들은 서윤재와 함께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다. 박지호와 정민우도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먼저 잘게."
"그래."
도현은 여전히 불꽃 앞에 앉아 있었다. 장작이 다 타들어가며 붉은 잔열만 남을 때까지,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모두가 잠든 시간, 도현은 눈을 뜨고 있었다. 텐트 천장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옆에서 박지호와 정민우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깊고 느린 숨소리, 완전히 잠에 빠진 사람의 숨소리였다.
도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침낭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캠프 밖으로 나섰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입김이 하얗게 퍼졌다가 사라졌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지만, 도현의 시선은 오직 한 방향으로만 향했다.
달빛 아래, 커다란 형체가 웅크려 있었다. 묵린이었다. 거대한 날개를 접고 몸을 둥글게 말아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비늘 표면에 달빛이 부딪혀 은은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마치 검은 산 하나가 그대로 앉아있는 듯한 크기였다.
도현은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발밑에서 자갈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조심스레 디딘 발걸음이었는데도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묵린의 한쪽 눈이 슬며시 열렸다. 금빛 눈동자가 도현을 향했다. 그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났다.
"안 자냐."
도현이 낮게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묵린은 그저 눈을 깜빡였다. 느리고 무거운 깜빡임이었다.
"오늘 좀 이상했어. 명령에 반응이 늦었잖아."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도현은 묵린의 곁에 앉았다. 땅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옷을 뚫고 스며들었다. 비늘에서 나는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오래된 바위 냄새 같기도 하고, 타다 남은 재 냄새 같기도 한, 익숙한 냄새였다. 지금껏 수백 번은 맡아왔던 냄새였다. 그런데 지금, 그 냄새 아래로 무언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낯선 냄새였다.
쇠와 피가 뒤섞인 듯한, 옅지만 분명한 이질감이었다. 도현은 코를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뚜렷해졌다.
"이거 무슨 냄새야."
묵린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보였다.
도현은 손을 뻗어 묵린의 목덜미에 가만히 얹었다. 따뜻했다. 늘 그렇듯 따뜻했다. 손바닥 아래로 비늘의 단단한 질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아래 심장이 뛰는 속도가, 평소보다 미묘하게 빠른 것 같았다.
"뭔가 있는 거야?"
묵린의 눈동자가 다시 감겼다.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도현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대로 목덜미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근. 두근. 일정한 간격이었지만, 확실히 예전보다 빨랐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묵린의 몸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도현은 그것도 놓치지 않았다.
"말 안 해줄 거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근데 나는 계속 물을 거야."
묵린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커다란 눈꺼풀이 다시 천천히 감겼다. 잠든 것처럼 보였지만, 도현은 그것이 완전한 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숨소리가 너무 일정했다. 지나치게 일정했다.
도현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냥 그 곁에. 밤바람이 불어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멀리서 짐승 울음소리가 들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도현은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팔을 얹었다. 시선은 여전히 묵린의 감긴 눈을 향해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묵린을 내려다보았다.
"내일 또 올게."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묵린의 한쪽 눈이 살짝 열려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현이 등을 돌리고 캠프로 돌아갈 때까지, 그 눈은 감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파티는 다시 짐을 꾸렸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었다. 안개가 얕게 깔려 있었고,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신입들은 각자의 짐을 정리하며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박지호는 하품을 하며 텐트를 접었고, 정민우는 지도를 확인하는 서윤재의 곁에서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서윤재가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오늘은 좀 다른 얘기를 해야겠어."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서윤재는 신입들을 먼저 바라보았다. 그다음 정민우, 박지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하나씩 옮겨갈 때마다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현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도현은 순간적으로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평소와 다른 눈빛이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한, 혹은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도현아, 잠깐 따로 얘기하자."
박지호와 정민우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신입들도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캠프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서윤재는 이미 몸을 돌려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평소와 다름없이 여유로웠지만, 도현의 눈에는 그 여유마저 이상하게 느껴졌다.
도현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어젯밤 맡았던 그 낯선 냄새가, 지금 서윤재의 등 뒤에서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쇠와 피가 뒤섞인 냄새. 옅지만 분명한 이질감.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착각이라 하기엔 너무도 선명했다.
박지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뭔 얘기 하려는 거지?"
"몰라."
정민우가 짧게 대답했다. 그의 눈은 서윤재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도현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씩, 서윤재가 걸어간 방향을 따라. 발밑의 흙이 안개에 젖어 축축했다. 그 축축함이 신발 밑창을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도현은 그 감각을 느끼면서도, 마음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어젯밤 묵린의 심장 소리.
낯선 냄새.
그리고 지금, 서윤재의 부름.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은 손끝의 냉기처럼,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