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같은 시간, 마을 외곽의 작은 상단 창고에서는 정민우가 낡은 서류를 뒤지고 있었다.
창고 안은 먼지 냄새로 가득했다. 종이 더미와 상자들 사이로 오래된 등불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무 선반은 삐걱거렸다. 벽 틈으로 스며든 저녁 빛이 서류 위에 얇은 줄을 그렸다.
곰팡이 냄새.
마른 잉크 냄새.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오래된 밀랍 냄새.
정민우는 그 냄새들 사이에서 손끝으로 종이 결을 하나씩 넘기고 있었다.
"이거 정말 다 봐야 돼?"
박지호가 옆에서 상자를 하나 더 옮겨왔다. 상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는지, 그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원래 조용한 마을로 떠나기로 했었지만, 정민우의 부탁으로 며칠만 더 머물러 있었다.
"응. 상단 쪽에 아는 사람이 이상한 소문을 들었대."
"무슨 소문."
"용왕의 맹우가 신입을 받는 방식이, 좀 이상하다는 얘기."
박지호는 상자에서 손을 멈췄다.
"이상한 방식?"
"들어봐."
정민우가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낡고 구겨진 종이였다. 모서리는 여러 번 접혔다 펴진 듯 하얗게 닳아 있었다.
"이건 길드 본부에서 나온 신입 모집 기록이야. 지난 반년 치. 봐, 지원자는 남녀가 거의 비슷해. 근데 최종 합격자는..."
박지호가 그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이 명단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렸다.
전부 여성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박지호는 다시 위로 눈을 올려 처음부터 다시 훑었다. 혹시 잘못 봤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명단은 똑같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해?"
"실력 평가 항목을 봐."
정민우가 다른 서류를 겹쳐 보였다. 종이 두 장을 나란히 펼치자, 항목별 점수표가 드러났다.
"묵린과의 친화력 테스트, 라는 항목이 있어. 이게 최종 점수의 절반을 차지해."
"묵린과의 친화력?"
"드래곤의 반응을 보고 채점하는 거지. 그런데..."
정민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손가락으로 표의 맨 아래 칸을 짚었다.
"채점자가 서윤재 혼자야."
박지호는 서류를 다시 넘겨보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표를 몇 번이나 다시 짚어가며 확인했다.
"이거, 서윤재 마음대로 점수를 준다는 소리잖아."
"그렇지."
"근데 왜 여자만."
정민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개인 서신이었다. 봉인이 뜯긴 채였다. 붉은 밀랍 자국이 반쪽만 남아 있었다.
"이것도 봐야 할 것 같아. 상단 쪽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거래."
"우연히?"
"우연히."
박지호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우연치고는 참 딱 맞게 흘러나오네."
"그러니까 캐물어봐야지, 어떻게 흘러나온 건지는."
박지호가 편지를 받아 읽었다. 서윤재가 어느 상단주에게 보낸 편지였다. 내용은 짧았다.
〈신입 선발은 계획대로 진행 중. 묵린의 반응은 아직 안정적이다. 다음 달까지 파티 규모를 두 배로 늘릴 예정.〉
"두 배로 늘린다고?"
박지호가 편지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편지 위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게 무슨 뜻이야?"
정민우의 표정이 굳었다.
"서윤재가 뭘 하려는 건지, 우리 둘 다 모르는 것 같아."
"묵린의 반응이 안정적이라는 게, 무슨 소리일까."
박지호가 중얼거렸다. 그는 편지를 다시 집어 들고 같은 문장을 두 번 더 읽었다.
"묵린 요즘 이상하다고 도현이 그랬잖아."
"그랬지."
"안정적이라는 거, 서윤재 입장에서 안정적이라는 거지. 그럼..."
정민우가 편지를 다시 접었다. 접힌 선을 손톱으로 꾹 눌러 자국을 냈다.
"묵린한테 뭔가 하고 있다는 거야, 서윤재가."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창고 안의 정적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밖에서 마차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가 사라졌다.
"이걸 도현이한테 보여줘야 할까?"
박지호가 물었다.
"보여줘야지. 얜 지금 아무것도 모르고 던전만 뛰고 있잖아."
"근데 도현이가 알아도 뭘 할 수 있을까. 이제 파티에서도 나왔는데."
정민우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다시 살펴보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서류들을 상자 위에 늘어놓고, 순서를 바꿔가며 다시 배열해보았다. 모집 기록. 점수표. 편지. 셋을 나란히 놓고 보니, 각각의 조각이 하나의 그림처럼 맞춰지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래서 가능할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파티 밖에 있으니까, 서윤재가 신경 쓰지 않을 거잖아. 안에 있었으면 절대 이런 걸 못 봤을 거야."
박지호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상자에 걸터앉아 팔짱을 꼈다.
"그럼 우리가 계속 이걸 캐야 하는 건가."
"당분간은. 조용히."
"조용히 살기로 했잖아, 넌."
정민우가 픽 웃었다.
"조용히 살려면, 일단 이게 뭔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거 궤변인 거 알지?"
"알아."
박지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늘 끝자락이 옅은 주황빛에서 서서히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서류 더미로 손을 뻗었다.
"좋아. 며칠 더 있자."
"고맙다."
"고맙다는 말은 이거 다 정리하고 해."
정민우는 대답 대신 다시 서류를 펼쳤다. 종이 더미는 여전히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다시 각자의 몫을 나눠 들었고, 창고 안에는 다시 종이 넘기는 소리만 조용히 이어졌다.
그 시각, 도현은 첫 던전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동굴에서 나온 뒤로도, 그 낮은 진동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아주 미약하게, 계속해서 그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발밑에서 시작된 그 울림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잦아드는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곤 했다.
길 양옆으로는 저녁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는 것이 보였다. 도현은 그 불빛을 보면서도, 정작 눈에 들어오는 건 다른 것이었다.
동굴 안에서 묵린이 잠시 멈춰 섰던 순간. 서윤재의 명령에 반응이 반박자 늦었던 그 순간. 그리고 그 직후 캠프에서 맡았던, 쇠와 피가 뒤섞인 듯한 낯선 냄새.
그 냄새는 지금도 코끝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을 어귀에 다다랐을 때, 그는 익숙한 두 사람을 발견했다.
박지호와 정민우였다. 둘 다 무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고, 걸음도 평소보다 느렸다.
"둘 다 왜 여기 있어? 각자 갈 길 간다고 했잖아."
정민우가 먼저 다가왔다. 그의 눈은 도현을 보는 대신,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 쪽으로 몇 번 내려갔다.
"도현아, 잠깐 시간 있어?"
"있지. 무슨 일이야?"
박지호와 정민우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낼지 정하지 못한 눈치였다. 박지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우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결국 정민우가 편지를 꺼내 도현에게 건넸다.
"이거 좀 봐."
도현은 편지를 받아 읽었다.
짧은 문장 몇 줄이었지만, 읽는 동안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그는 편지를 한 번 다 읽고 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같은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다.
"이게 어디서 나온 거야?"
"상단 쪽에서. 우연히."
"묵린의 반응이 안정적이라니..."
도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어젯밤 캠프에서 맡았던 낯선 냄새가, 다시 코끝에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쇠와 피가 뒤섞인 듯한, 그 이질적인 냄새.
"뭔가, 진짜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박지호가 말했다.
"뭘."
"묵린을 통제하려는 거. 그것도 지금까지랑은 다른 방식으로."
도현은 편지를 다시 접어 손에 쥐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지난밤, 동굴에서 느꼈던 그 진동. 서윤재의 명령에 반응이 늦어지던 묵린의 모습. 그 모든 것이 이 편지의 한 문장과 겹쳐지고 있었다.
〈다음 달까지 파티 규모를 두 배로 늘릴 예정.〉
"두 배로. 그러면 지금 파티원들 말고, 새로 들어올 사람들 자리까지 이미 계산해뒀다는 거네."
도현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 것 같아."
정민우가 대답했다.
"근데 왜 굳이 지금이지? 파티가 안정적으로 잘 돌아가고 있었잖아. 굳이 규모를 늘릴 필요가 있나."
"그건 우리도 몰라. 그래서 캐고 있는 거고."
박지호가 덧붙였다.
"신입 모집 기록이랑 점수표도 봤어. 최종 합격자, 전부 여자야. 한 명도 빠짐없이."
도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채점 기준이 뭔데?"
"묵린과의 친화력. 그런데 그거 채점하는 사람이 서윤재 혼자래."
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여러 조각들이 하나씩 맞춰지고 있었다. 동굴에서의 진동. 캠프의 낯선 냄새. 그리고 지금 이 편지의 문장들.
"이거, 좀 더 알아봐야겠다."
도현이 말했다.
그 순간, 다시 그 낮은 울림이 느껴졌다.
웅—
이번에는 조금 더 강했다.
세 사람 모두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거리도 방향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무언가가 그들의 감각에 직접 신호를 남긴 것 같았다.
박지호가 먼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저녁 어스름과, 그 사이로 드문드문 켜진 별빛뿐이었다.
"방금 그거, 들었지?"
"들었어."
정민우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도현은 울림이 사라진 뒤에도 허공에 시선을 고정했다. 손끝에 쥐고 있던 편지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이거, 묵린이 보내는 신호일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 어둠이 조금씩 더 짙어지고 있었고, 그 울림은 다시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그것이 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