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청명학원 생존수칙

1화

청명학원의 가을은 유독 안개가 짙었는데, 그것은 학원이 자리한 분지 지형과 인근 하천의 습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정작 그 원인을 궁금해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안개는 그저 매년 이맘때면 당연히 찾아오는 손님처럼 여겨졌고, 학원생들은 그것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기보다는 그 속을 헤치며 등굣길을 서두르는 데 더 익숙했다. 그러나 이도현에게는 그 안개가 조금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그것이 매년 자신을 감싸주는 것 같아 오히려 고맙게 여기곤 했다. 눈에 띄지 않는 것, 존재감을 지우는 것, 그것이 그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스스로에게 세운 첫 번째 원칙이었다. 전생에 그는 '청명학원'이라는 이름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을 열 번도 넘게 클리어한 게이머였다. 회사에서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새벽, 침대에 누워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도 그 게임의 결말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우습게도 그를 이 세계로 이끈 이유였다. 어느 결말에서 여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며 웃던 장면이었는지, 아니면 배드엔딩에서 조연들이 몰살당하던 장면이었는지는 이제 기억조차 가물가물했지만, 그 흐릿한 기억이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다만 그는 주인공으로 태어나지 못했고, 대신 게임 어디에도 이름이 나오지 않는 조연 교사, '이도현'이라는 인물의 몸으로 눈을 떴다. 대본에도 없고, 공략 사이트에도 언급되지 않는 이름. 명예도 없고 위험도 없는 자리였다. 그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게임 속에서 이 세계는 언제나 시작 시점, 즉 여주인공들이 학원에 입학하는 그 해로부터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본편이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일 년이었다. 그는 그 일 년을 조용히 흘려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왕녀도, 성녀도, 특待생도 그의 삶과는 무관한 존재들이어야 했다. 그가 기억하는 시나리오 속에서 조연 교사들은 대개 배경으로 등장했다가, 어느 순간 사건에 휘말려 이용당하거나 소모되는 역할을 맡았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곧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는 캐릭터들. 그는 그런 인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아침마다 그는 교무실 구석 자리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며,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기를, 그저 그것만을 바라며 하루를 시작했다. 옆자리의 노년의 수학 교사는 종종 그에게 말을 걸어왔는데, 대개는 급여에 관한 불만이었다. "이번 달에도 수당이 깎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가 물으면 이도현은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생활비는 늘 부족했고, 학원 측의 급여는 짜다 못해 야박했지만, 그는 그 정도 불만은 안전이라는 대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굶지 않을 정도면 충분했다. 눈에 띄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날 아침도 다르지 않았다. 이도현은 복도를 걸으며 창밖으로 옅게 깔린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 정원의 나무들은 안개에 반쯤 잠겨 윤곽만 어른거렸고, 그 흐릿한 풍경이 오늘도 별일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안도감을 그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지나가는 학생인가 싶어 무시하려 했으나, 발소리는 점점 그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교복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는 여학생이 서 있었다. 은빛에 가까운 금발이 아침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정도였는데, 그는 그 얼굴을 알아보는 순간 심장이 툭 내려앉는 걸 느꼈다. 선하린. 게임 속 첫 번째 여주인공이자, 선유국 제1왕녀. 게임 오프닝에서 가장 먼저 화면을 채우는 얼굴이었고, 열 번의 회차 중 아홉 번을 그가 직접 고백을 받아낸 캐릭터였다. 그런데 지금 그 얼굴이, 스크린 밖에서, 자신을 향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교사님." 그녀가 말했다. 존댓말이었으나 어딘가 명령조가 섞여 있어, 그는 순간 이 대화를 어떻게 끝내야 안전할지부터 계산하기 시작했다. "방금 제가 넘어질 뻔했는데, 다른 학생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원망이 섞여 있었지만, 그 원망의 방향이 그가 아니라는 것쯤은 분명해 보였다. 이도현은 순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와주지 않은 학생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자신만 남아 그 원망을 받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괜찮으십니까." 그가 짧게 물었다. 되도록 감정을 싣지 않은, 사무적인 어조였다. 게임 캐릭터들과의 대화 선택지 중 가장 안전한 것을 고르는 기분이었다. 호감도가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딱 그 정도의 대답. 그러자 선하린은 잠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 시선이 이상하게 오래 머물렀다. 마치 그가 방금 무언가 특이한 행동을 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교사님은 제가 왕녀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평범한 학생 대하듯 물으시네요." 그녀가 말했다. 그 말에 이도현은 속으로 아차,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원칙은 눈에 띄지 않는 것이었는데, 방금 그는 정확히 반대되는 행동을 한 셈이었다. "실례가 되었다면 사과드립니다." 그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목소리가 살짝 떨렸는데, 그것이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왕녀님, 괜찮으십니까." 그러나 선하린의 표정은 오히려 부드러워졌는데, 그것이 그에게는 더 불안한 신호였다. 그녀는 열여섯의 나이에 이미 왕가의 별의 힘, 빛의 각성자로 알려져 있었고, 늘 사람들 앞에서는 '왕녀'라는 틀 안에서만 대해졌다는 걸 그는 게임 스토리로 이미 알고 있었다. 교사들은 그녀 앞에서 지나치게 격식을 차렸고, 학생들은 지나치게 거리를 두었다. 아무도 그녀를 그냥 한 명의 학생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방금 자신이, 무심코, 그 금기를 깨버린 것이다. "됐어요, 사과는." 선하린이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오히려 그게 신기해서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는데, 그것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지, 다른 무언가의 시작인지 이도현은 판단할 수 없었다. 판단이 서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위험 신호였다. "교사님 이름이 뭐죠?" 그녀가 물었다. 그 물음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도현은 그녀의 눈빛에서 읽어냈다. 반짝이는 눈동자 안에 담긴 것은 흥미도 아니었고,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무언가, 정적을 깨는 첫 균열 같은 것이었다.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이미 왕녀 앞에서 이름을 감추는 것이 더 큰 실례가 될 거라는 계산이 그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부딪혔다. "이도현입니다." 그가 답했다. 대답과 동시에 그는 속으로 이 이름을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밀려들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선하린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한 번 굴리듯 되뇌었는데, 그 순간 그녀의 표정에 스친 것은 분명한 결심 같은 것이었다. "이도현, 이도현 교사님." 그녀가 다시 한 번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다. 마치 잊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기억해 두겠습니다, 이도현 교사님."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서 걸어갔는데,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도현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안개 속으로 사라져가는 은빛 금발이 마치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안개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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