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선유국은 대륙 중부에 자리한 왕국으로, 별의 힘이라 불리는 초자연적 권능이 왕가와 귀족, 그리고 소수의 각성자들에게만 발현되는 세계였는데, 그 힘은 각기 다른 속성을 지녀 빛, 치유, 화, 물, 바람 등으로 나뉘어 전해져 내려왔다. 이도현이 게임을 플레이하며 익혔던 설정에 따르면, 이 힘의 발현은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유전이나 특정 계기로 일어나며, 각성한 자는 곧 국가와 교단이라는 두 축의 관심을 동시에 받게 되는 구조였다. 왕가는 왕녀 선하린을 통해 빛의 힘을 상징적으로 내세우고 있었고, 교단은 성녀 채은을 통해 치유의 힘을 신성한 권위로 포장하고 있었는데, 두 세력은 표면적으로는 협력 관계였으나 실상은 서로를 견제하는 미묘한 긴장 속에 놓여 있었다.
청명학원은 바로 이 두 세력이 교차하는 지점에 세워진 기관이었다. 왕가의 후계자와 교단의 성녀가 같은 공간에서 교육받는다는 것 자체가 상징적인 균형의 표현이었으나, 그 균형은 언제나 살얼음판 같았고, 어느 한쪽의 작은 움직임도 곧바로 정치적 파장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도현이 처음 이 세계에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파악한 것도 바로 이 구조였는데, 그는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어느 쪽의 눈에도 들지 않는 것이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게임 속 시나리오를 수백 번 되짚어 보았을 때도 그 결론은 언제나 같았다. 눈에 띄는 조연은 반드시 어느 쪽으로부터든 이용당하거나 제거당했다. 그것이 이 세계가 조연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결론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왕녀는 그의 이름을 기억했고, 성녀는 그에게 처음으로 규칙 밖의 세계를 언급했다. 두 사건이 각각 얼마나 위험한 무게를 지녔는지 그는 뒤늦게 체감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 무게가 단순히 소문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소문은 통제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소문을 며칠 지나면 잊었고, 새로운 소문이 그 자리를 덮어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소문이 아니었다. 왕녀와 성녀, 두 명의 각성자가 동시에 그를 주목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의 사건이었고, 사건은 소문과 달리 기록되고 추적되었다.
교단 소속 감독관이 학원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감독관의 목적은 성녀 채은의 학원 생활을 점검하는 것이었다고 알려졌지만, 이도현은 그 방문이 채은과 자신 사이에 오간 짧은 대화들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했다. 교단은 성녀의 일상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조직이었고, 그녀가 규칙 밖의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그 파장은 채은 개인을 넘어 학원 전체로 번질 수 있었다. 감독관이라는 직함 자체가 그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게임 속에서 그 직함을 가진 인물들은 대개 성녀나 왕녀의 주변을 어지럽히는 방해 요소를 처리하는 역할로 등장했고, 처리라는 단어는 언제나 물리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교무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그는 몇몇 동료 교사들의 대화를 스치듯 들었다. "감독관이 온다던데, 이번엔 좀 심하게 본다더라." "성녀님 관련이니 당연하지. 교단이 얼마나 예민한지 몰라?" "괜히 눈에 띄는 짓 하는 사람 없었으면 좋겠는데." 이도현은 그 말들을 들으며 걸음을 늦추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자신이 그 눈에 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서은은 이 소식을 전하며 유독 굳은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같으면 사무적인 어조로 일정을 전달하고 곧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을 그녀였는데, 이번에는 말을 고르는 듯 몇 번이나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감독관은 성녀님뿐만이 아니라 학원의 관리 체계 전반을 점검할 겁니다." 그녀가 말했다. "이도현 교사님은 특히 언행에 주의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 말속에는 명령이라기보다 부탁에 가까운 절박함이 배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 역시 이 긴장된 균형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이도현이 물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이미 스스로도 답을 알고 있으면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한서은은 잠시 침묵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잘못은 아직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 생길 수 있다는 게 문제겠지요." 그녀의 시선이 그의 눈을 피해 창밖으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성녀님과 나눈 대화들, 전부 기록으로 남기지는 않으셨겠지요."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었고, 이도현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기록이라니요." 그가 되물었다. "그냥 지나가는 대화였습니다." "지나가는 대화라도, 감독관 눈에는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한서은이 말을 끊고 서류철을 다시 정리하며 덧붙였다. "교단은 성녀님이 규칙 밖의 것을 접했다는 사실 자체를 문제로 여깁니다. 그 규칙 밖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 말이 예언처럼 들린 것은 그의 불안이 이미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도현은 잠시 서류철을 든 한서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조차 이 상황이 편치 않다는 뜻이었다. 학원의 행정을 총괄하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곤두세운다는 것은, 감독관의 방문이 그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사안이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감독관은 언제 도착합니까." "사흘 후입니다. 그동안 성녀님과의 접촉은 최소화해 주십시오.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한서은은 그렇게 말한 뒤 서류철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고, 더 이상 덧붙이지 않았다. 마치 그 이상을 말하면 자신도 어딘가에 걸려들 것처럼.
복도를 나서던 그는 창밖으로 안개가 걷히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며칠째 학원을 감싸고 있던 새벽안개가 오늘은 유난히 빨리 걷혀, 담장 너머 정원의 나무들이 선명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를 감싸주던 안개가 걷힌다는 것은, 그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는 존재로 남을 수 없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걷혀가는 안개를 바라보았다. 안개 속에 있을 때는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지만, 이제는 누구든 원한다면 그를 정확히 짚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